세 미 나



                                                                                                                        이 영 자

 

이 글은 지난 2005년 11월 제4회 대한민국작곡축제에서 열렸던
작곡가초청 세미나를 녹취하여
그 자료와 함께 인사이드뮤직이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부

 
작곡가 이영자는 _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하여 춘천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 대학교음악대학 및 동 대학원을 거쳐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 음악원과 뉴욕 맨하튼 음대, 벨기에 브뤼셀 왕립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하였고, 프랑스 파리 IV - 소르본 대학에서 음악학으로 D.E.A.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를 역임하였고(1961~1983)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한양대학교 및 경원대학교 등에도 출강하였으며 파리 IV-소르본 대학에서 초청교수로 특강을 하였다.
대학원 재학시절 문교부 주최 제4회 전국 음악 콩쿨 작곡부문 수석입상(1956)을 비롯하여 제8회 대한민국작곡상(1986), '올해의 음악가상', 한국음악상(1994), 제27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통령상(1995), 제15회 대한민국 작곡상 최우수상(1996), 제14회 예총 예술문화대상(2000), 제2회 강원도 여성상(2002)을 수상하였다.

1981년 초, 여섯명의 창립회원으로 <한국여성작곡가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아세아 작곡가연맹 한국위원회 회장, 한국작곡가협회 부회장, 한국음악협회 부 이사장, 전문직 여성의 봉사단체인 국제 존타(ZONTA) 서울클럽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New Grove Dictionary of Women Composers(1994) 와 New Grove's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2001)등에 등재되었다.

그의 작품은 국내는 몰론,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멕시코, 인도네시아, 호주, 일본, 중국, 대만 및 러시아 등지에서 연주되고 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관현악곡 광복30주년 위촉 '축전서곡', 광복 50주년 위촉 칸타타 '대한민국 찬가', '음악인찬가', MBC 문화재단 위촉작품 '개천절' 교향곡, 협주곡 등이 있고 작품외에도 '엄격대위법', '전위대위법 및 캐논' 등의 저서와 연구논문 'Olivier Messiaen 의 관현악 음악에 대한 미학적, 윤리적 연구'등이 있다.





  ‘음악은 시공을 초월해서 그 어떤 소재, 기법으로 표현하더라도

아름다움의 미학을 가장 깊은 곳에 반석으로 두고

살아있는 영혼의 소리를 담으라’는 철학을 일찍이 나에게 심어주신 스승

故 나운영 교수님의 12주기에 이 회고의 세미나를 헌정합니다

 

I. 음악과의 만남

일제 말기였던 1940년, 초등학교 3학년생이었던 나는 어느 날 강제로 piano 앞에 앉게 되었다. 일본인 선생 國岡保는 음악을 전혀 모르는 나에게 학교 piano로 악보 읽기와 노래 부르기를 가르쳐준 것이다. 바이엘, 소나티네, 체르니 등을 접하며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고 스승은 쫓기듯 일본으로 떠났다. 그는 떠날 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을 내게 주며 준엄하게, 마치 유언처럼, 음악 공부를 계속하라고 하였다. 그것이 나와 음악과의 기적적인 만남이었고 운명이었다. 훗날 나는 그 때를 생각하며 그 스승이 하나님의 계시로 내게 다가와 나의 음악 인생을 운명 지어 주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술의 천재들은 태어날 때 하나님이 주는 예술의 보자기(褓)에 싸여 태어난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러나 나는 태어날 때 내 작은 주먹 속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음악의 씨앗을 하나 꼭 쥐고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씨앗이 음악의 여신 ‘Muse’라고 나는 믿고 싶다. 그 일본인 스승은 하나님의 뜻으로 내게 다가와 음악의 씨앗을 나로 하여금 대 자연의 대지에 심어주고 갔다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음악에 문외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는 유교적 사상이 짙어 여성의 교육열이 미약했고, 또한 내가 성장한 곳이 도시가   아닌 강원도 시골 이였기에 음악을 접했어도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기적과도 같은 운명적 행운은 그 어려운 시절, 음악 공부는 절대로 안 된다던 부모를 이기고 오늘날까지 음악을 먹고, 입고, 숨쉬며 나로 하여금 음악의 밭에서 하나의 나무로 자라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1947년 나는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결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나온 음악 교과서에서 平生을 좌우하고 지배하는 작품을 만나게 된다. 한글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던, 해방 후 최초의 한글로 된 음악 교과서에 실린 두 개의 노래, 『아! 가을인가』와  『물레』였다. 그 곡은 내게 정신적 지주가 된  노래였다.


           학창시절 우리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정서적인 마음을 길렀다. 아울러 이 노래의 작곡가에 대한 존경과 선망과 감동은 나의 생애의 음악 인생에 큰 기둥으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아! 가을인가』는 나운영 (1922~1993)의 16歲 때 작품이었고,『물레』는, 불확실 하기는 하나 김순애 (1920)의 10代 후반 혹은 20代 초의 노래였다고 생각된다. 나운영 선생님의 『아! 가을인가』는 가장 높은 음에서 시작, 아래로 10도 내려오는 아름다운 선율이었고, 『물레』는 10도의 音高에서 흘러가는 우리 고유의 민요 풍의 선율의 노래였다 (그 당시는 『아리랑』 조차 몰랐던 시기였다). 특히 선율 內의 9도의 불협화음정으로 도약하는 것은 내게 매우 매력적이었고 인상적이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음악 교사도 없는 춘천여자고등학교 에서 학교 piano에 매달려 Beethoven, Mozart, Chopin, Schumann의 piano 작품을 거의 독학으로 공부하였고 1950년 5월, Chopin의 『Fantasy Impromptu』를 연주, 이화여자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 피아노 과에 입학하였으나 45日 만 에 청천벽력 같은 6. 25 사변을 만났다.

1950년 6월25일부터 9월28일 연합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서울을 다시 찾는 100日 가까운 날을 나는 혼자 부모를 찾아 3 만리를 헤매는 삶을 살았다. 강원도의 구석 구석을 걸어 다녔고 하루 한번도 끼니도 못 잇고 生과 死를 넘나들었었다. 내 나이 열아홉의 청춘에서 얻은 것은 절망은 없다는 진리였고 나는 그 때 절실하게 살아남는다면 재현예술인 Pianist의 꿈을 버리고 삶의 고뇌를 작곡으로 표현하리라 마음 먹었다. 나는 굶주림과 공포와 처절함이 가슴 속 깊이 창작 음악으로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나의 고통으로 솟아나온 음악들이 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고통에서 빛을 찾게 해주고 싶다는 강한 충동적 힘을 얻은 것이다.

asdfkjadshflkjadhsfapwieuryaskdjfhalskdjfhaweioruasldkfjh II. 시대적 배경

나의 음악은 엄격한 전통 양식 속에서 성장하며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순수음악 예술의 과정을 청각적, 시각적, 공간적으로, 동등한 미학적 음악 탐구로 표현하며 추구하는 것이다. 1950년대, 20세기의 한 가운데에서 나의 창작 수업은 시작되었다. 그 당시의 세계음악사의 시대 사조는 후기 낭만파에서 근대음악으로 전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새로운 음악으로 소위 ‘전위음악 (현대 음악)’의 조류가 다양한 모습으로 발돋움하던 시기였다   
2005년 11월 대한민국 작곡축제 - 작곡가초청 세미나 '이영자의 음악세계' 모습
    

 당시 우리 나라의 창작계 역시 이러한 현대음악으로 변해오는 과정이 막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서양음악이 도입된 지 약 반 세기가 지났으나 동양의 유교적, 봉건적 사상으로 인해 많은 비약적 발전은 어려웠다고 본다. 더욱이 1950년 6월 25일의 동란으로 인해 황폐해진 사회에서 순수예술음악이 태동했다는 점은 분명 기적적인 역사적 시발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혈기와 정열로 우리나라 현대음악을 개척하신 故 나운영 교수의 노력과 열정은 진정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1956년, 나운영 교수는 <한국현대음악학회>를 서울에 창설하셨고 나는 그 학회의 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 해, 우리나라 최초로 독일에 본부가 있던 <국제현대음악학회  ISCM (International Society of Contemporary Music)>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1959년 여름, 나는 독일 Baden-Baden에서 개최되었던 <ISCM Festival>에 참관하였다.

나와 나운영 교수와의 첫 만남은 1951년 초, 전쟁의 와중에 있던 부산 피난 시절, 길가에 붙어있던 <나운영 작곡 교실>이라는 현수막을 보고 마치 몽유병자처럼 찾아가 그의 문하생이 되면서였다. (당시 대학의 문은 닫혀 있었고 1951년 겨울에 비로소 대학은 다시 문을 열었다.) 그로부터 8년간 나는 혹독한 음악 수업을 받았고 1956년 (제1회), 1958년 (제2회), 두 차례의 작곡발표회를 마치고 프랑스 Paris로 유학을 떠났다.

나의 음악 수업은 1951년에서 1958년 유학 길에 오르기까지의 음악 수업을 말한다. 그 당시는 악보도, 레코드도 없었다. 다만 종로 2가에 있던 <르네상스 다방>과 명동의 <돌체 다방>만이 Short Play (SP), 뒤에는 Long Play (LP)라는 레코드를 다량 소장하고 있어 그 곳에서 하루 종일 음악을 들었다. 아니, 차라리 음악을 먹었다고 말하고 싶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 곳에 들려 5~6 시간은 앉아 고전, 낭만, 후기 낭만 음악을 감상하였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고 비록 53년에 종전은 했어도 당시 사람들의 사상이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에서인지 주로 Beethoven의 『운명 교향곡』, 『황제 협주곡』, 『Violin 협주곡』, Tchaikovsky의 『비창 교향곡』, 『Violin 협주곡』등이 애청되었다. 그 시대 상황에서 볼 때, 삶의 극한까지 겪은 우리들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Bartók, Kodály, Stravinsky, Debussy, Ravel 그리고 R. Strauss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 당시 나는 대학생, 대학원생이었으나 학교 공부는 많이 소홀하였고 음악에 미치듯 그 곳을 다니며 음악 공부를 하였고 밤 세워 작품을 썼다. 그 많은 음악을 공부한 것이 훗날 Paris에서 공부할 때에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 주었다.

(첼로 소나타 음악 감상)

이 곡은 15년 전에 음악회 할 때 녹음한 것인데 오늘 테이프로 담아왔다. 이 곡은 내 동생인 이정자가 연주해 주었다. 내가 경기여고를 다닐 때 어린 동생에게 첼로를 권했는데 아버지께서 첼로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를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께 졸라서 동생은 음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들은 음악의 2악장은, 나의 낭만, 즉 고통, 슬픔, 처절함 등등을 음악 안에서 표현하고자 했었던 곡이다. 이에 반해 3악장은 어떠한 난관이 닥쳐오더라도 나는 그것을 이겨낼 것이다 하는 다짐을 표현하고자 하여 음정을 완전음정을 쓰기 보다는 증, 감음정, 불완전 음악을 썼다. 56년인 25살때 이 곡으로 콩쿨에 입상한 후로부터 이 음악이 나의 음악 인생에 데뷔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지금도 나의 음악 인생은 56년부터 라고 생각한다.

 

III. 외국 수학과 나의 스승

1958년 9월에서 1961년 3월까지 나는 프랑스 Paris에서 공부하였다. 그 당시는 여성에게 유학은 가당치도 않았던, 더구나 6. 25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어 재건에 한참이었던 어렵던 시기였다. 나는 친구 전혜린과 함께 독일 München (뮌헨)으로 가려 했으나 나운영 교수의 간곡한 추천으로 당시 Olivier Messiaen (올리비에 메시앙 1908~1992)이 있던 Paris로 발길을 돌렸다. 1954년 나운영 교수는 Messiaen과 스위스 작곡가 Frank Martin (1890~1974)의 서신을 내게 보여주며 두 분 중 누구에게 작곡을 사사할까 고민하셨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유학의 꿈은 깨지고 결국 자신이 못 이룬 뜻을 제자인 내게로 밀어 주셨다. 1958년 나는 Paris 국립 고등 음악원 외국인과에 등록, 작곡은 Tony Aubin (1907~1981) 에게, 대위법 및 Fuga는 당시 거의 70세의 고령에 가까웠던 저명한 Noël Gallon (1891~1966) 에게 사사하였다. 또한 Schola Cantorum에서 대위법, Fuga 및 관현악법을 Daniel- Lesur (1908~2002  <Jeune France 프랑스 4인조>의 일원)에게 공부하였다. Paris 에서의 3년간의 시간은 나에게 혹독한 음악이론 공부 기간으로서 처음으로 창작의 어려움을 맛보게 해주었다. 당시 Messiaen은 Paris 음악원 음악분석 교수로 그의 특강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작곡은 또니오방 선생님께 배웠는데 윤이상 선생님도 그 분께 배웠었다고 한다.

이 후 1964년에서 1966년까지는 미국 뉴욕 맨하탄 음악대학에서 Ludmilla Ulela에게 음악 분석과 작곡을 수학하였고, 1969년에서 1972년 사이, 벨기에의 왕립 음악원에서 Marcel Quinet에게 (1915~1986) 작곡, Fuga 및 관현악법을 사사하였다. 그 뒤, 1986년, 당시 Amsterdam의 Sweelinck (슈벨링크) 음악원 학장이자 네덜란드의 대표적 작곡가였던 Ton de Leeuw (통 드 레오 1926~1996)를 만나 1990년까지 4년 가까이 나의 음악적 삶의 마지막 음악 수업을 받은 것과 나의 음악의 예술 철학을 확립하게 된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고 기쁨이었다. 사실 1987년, 네덜란드에 온지 불과 1년 뒤 나는 다시 Paris로 자리를 옮겨가게 됐으나, 그 역시 은퇴 후 부인의 고향인 Paris에서 거주했기에 나의 음악 수업은 계속될 수 있었다. 1993년 당시 내가 아세아 작곡가연맹 한국위원회 회장으로 활동할 때, 대전 Expo와 함께 개최되었던 <아세아 작곡가 연맹 국제 대회>에 그를 한국으로 초청, 세미나와 그의 작품 연주와 더불어 한국을 직접 보여주고, 그가 우리 음악의 아름다움에 감동 받고 떠난 것은 내게 크나 큰 행복이었다. 그 후 몇 년 뒤, 그는 타계하였다.

이렇듯 1951년에서 1990년까지 40 여 년간 내게 사랑과 함께 음악이 무엇인가를 심어준 이 스승들이 지금은 내 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하지만 그들이 내게 심어준 숭고한 예술성은 내 안에 늘 빛나고 살아 숨쉬고 있음을 나는 항상 느끼고 산다. 서양 음악사에서의 동양음악의 위치를 살펴볼 때, 그 계보는 1889년 Paris에서 개최된 <만국 박람회>에서 프랑스의 C. Debussy가 Gamelan 음악에 빠져 동양음악에 처음 눈을 뜨고, Olivier Messiaen이 Debussy의 opera 『Pelléas와 Mélisande』의 영향으로 그의 뒤를 이어 힌두 음악으로 동양음악세계에 매료되었고, Messiaen의 제자인 Ton de Leeuw 역시 동양음악에 심취하였으며 (특히 한국의 正樂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 뒤를 이어 내가 그 줄기를 타고 공부했다는 사실은 내게 더없이 크나 큰 재산이자 축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거의 20 년의 외국생활에서 1958년에서 1961년까지의 기간은 순수한 음악 수업 유학이었고 그 후는 외교관 남편의 임지에서 수학한 것이다.

 

IV. 나의 미학적 특색

의 음악어법은 크게 몇 가지 특색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1) 의식적으로 조성 탈피하는 Dodecaphony적 색채

1950년대의 나의 음악의 방향은 지금까지 배워온 기능 화성을 스승의 강요에 의해 버리는 것이었다. 나운영 선생님께서 내게 화성학을 가르쳐주시고 난 후 앞으로 곡을 쓸때는 절대 쓰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그 3화음들은 내 속의 기본으로 있는것이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새것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화성을 쓰는 것에 있어서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초창기는 조성으로 작곡하되 조성을 의식적으로 파괴하는 방향으로 음을 추구하였고 선율, 리듬, 음색, 음정 진행에서 눈에 띄게 증 음정, 감 음정, 부가 음 등을 사용하여 조성을 잃어가도록 했다. 즉, 불규칙 균형의 美에서 색채가 있는 소리를 찾는 것이 나의 꿈이며 미학이다. 또한 12음을 자유로이 구사하는 Dodecaphony로 표현하려 노력했다. 이러한 점은 현재까지도 나의 음악에 미학적, 역학적 (力學的) 밀도로 작용하고 있다.

1953년에서 1958년 유학 갈 당시까지 사용한 나의 음정 진행은 증 4도, 증 5도, 감 5도, 증 6도, 감 7도, 증 8도 였다 :

1958년 Paris에서 처음 접한 O. Messiaen의 음악어법의 발견 (특히 그의 Mode)은 나의 스승의 작곡 교육에 새삼 감탄하고 감사하게 했다. (1958년 Paris 유학 길에 오르기 전까지 스승도, 나 자신도 Messiaen의 음악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당시에는 메시앙의 음악을 듣지 못했는데 막상 가보니까 내가 즐겨 쓰는 음정을 메시앙이 쓰고있던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한국에서 50년대에 내가 이렇게 쓸수 있다는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다. 내가 그런 화음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나운영 선생님의 덕분이다.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번 나운영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일찍이 의도적으로 조성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나의 선율의 진행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색은 음정의 도약이 거의 불협화음정이라는 점이다. 특히 증2도, 증4도, 감5도, 장7도, 증8도, 장9도의 선율 진행을 많이 발견한다.

 

2) 대위법적 어법

나의 음악은 대위법적이다. 나는 음악에서 첫번째로 따지는 것이 대위법이다. 대위법은 반석이다. 내 음악의 반석은 대위법이다. 만드는 소재, 기법, 방법을 초월, 음악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 즉 음 하나하나의 생명력은 균형 있는 대위 (對位)로 구성, 발전시키며 수직적인 울림을 떠나 음악의 수평적 흐름에 예술적 영혼을 추구한다 (확대, 축소, 역행, 반 진행의 기법). 그러므로 내가 가장 강하게 고집하는 音 對 音의 균형은 나의 ‘음악의 절대 필수적 반석’으로 존재한다.

 

3) 서정적, 신비주의적 신 낭만주의적 색채

나의 음악어법은 시대의 변화를 초월해서 서정적 (lyrical), 신비주의적 (mystical)이며 新 낭만주의적 (Neo-Romanticism)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속에서 polytonal, polychord의 ‘동시 겹쳐짐 (superposition)’과 ‘옆으로 펼쳐짐 (juxtaposition)’의 기법이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특히 나의 음악에서 화성은 먼저 ‘색채’를 찾은 후에 찾아진다. 주로 polychord의 “ 동시 겹쳐짐 (Superposition)”과 해결되지 않는 불협화음을 이용, 음악의 빛깔의 밝고 어두움의 대조로 고뇌를 표출한다. (『나비의 연가』, 『Auto-Portrait 자화상』, 『Piano Sonata』, 『Réminiscence』, 『Réflection』등)

 

4) 한국적, 민족적인 색채

나는 음악이 한국적이며 민족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슴에 안고 산다. 하지만 이는 의식적이라기보다 (조형적이므로) 무의식적으로 나의 인간의 소리로 표현됨으로 나의 음악은 한국적이다. (악보 : 온음정, 완전 음정, 5음 음계, 민요 선율, 온음 음계로 쓴 작품을 한국적이라 하였다. 『Piano 협주곡 I, II』, 『개천절 축전 서곡』, 『나비의 연가 II』,『나비의 연가 III』, 『세 대의 거문고를 위한 “희수에 부르는 노래”』, 『Piano Sonatine』, 『Piano Sonata』 등 거의 모든 작품에서 느낄 수 있다.)     

 

5)  <분할 불가분의 리듬>과 <리듬적 등장 인물 기법 (Les Personnages Rythmiques )>

나는 리듬어법에 있어서 불규칙 리듬을 애용한다. 음의 길이를 확대 혹은 축소하며 3, 5, 7, 9의 연속 리듬을 사용, 박자 개념도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박(拍)을 애용한다. “분할 불가분”의 이 리듬들이 나의 음악의 바닥에서 미학적 밀도를 더해준다.

<리듬적 등장 인물>의 개념의 출발은 Stravinsky의 『봄의 제전』中 <신성한 춤>의 악장에 처음 시도되었다. 3개의 音군 (선율군), A, B, C가 있으며 A의 音군은 확대되는 리듬으로 행동적으로 등장하며, B의 音군은 감소하는 리듬으로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C의 音군 (선율군)은 변화하지 않는 리듬으로 움직이지 않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나의 Piano 작품 『Réminiscence』와 『Piano와 Harp를 위한 Auto-Portrait  자화상』은 12음으로 구성된 하나의 주제가 A, B, C군으로 리듬적 등장 인물들을 반복, 발전하며 약간 자유로운 부분을 더하며 작곡되었다.

<악보 예:  38~ 41『Piano와 Harp를 위한 Auto-Portrait』>
 

 

 

 

V. 나의 예술 가곡

1953년~1956년에 걸쳐 네 개의 가곡『아스라이 그리운 옛 노래』를 작곡하고는 스승에게서 금지령이 내렸다. 이는 기나 긴 삶에서 가곡 작곡가로 정주하지 말라는 뜻이었고 좀 더 넓은 세계를 향해 현대음악의 흐름을 타고 새로움을 찾으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1968년, 위촉 가곡 두 곡을 작곡한 후 (조지훈 詩) 내 나이 이순 (耳順)이 되도록 노래는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사실 스승의 뜻은 가곡은 人體에서 나오는 음악이므로 사람의 마음을 기계적, 현대적 기법의 노래로 괴롭히지 말라는 것과 가곡은 삶의 희로애락을 어느 정도 음미한 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오장을 통해 쏟아내는 삶의 이야기로 엮으라는 뜻이었다. 그 당시에는 몰랐으나 노년에 들면서 이것이 진리임을 깨달았다. 耳順이 되면서 오래 만에 김남조 詩로 3개의 사랑노래를 작곡, 그 후로 해마다 많은 가곡이 탄생했다 ; 김남조 詩 (17곡), 이해인 詩 (7곡), 천상병 詩 (7곡), 신 달자 詩 (3곡, 미 발표), 박경리 詩 (3곡, 미 발표), 그리고 그 외 詩로 60 여 곡의 가곡을 작곡하였다.

나의 노래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나는 詩로 노래 선율을 먼저 만들지 않고 그 詩가 주는 깊은 뜻을 먼저 piano에서 찾는다. 詩의 내면을 탐구, 음악을 먼저 만들고 노래의 선율은 人體에 있으므로 가능하면 편안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나의 노래는 piano 반주가 아닌 하나의 piano를 위한 서정詩이다. 그래서 노래 성부를 빼고 piano의 반주부만 연주해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는 나의 노래가 <Piano와 노래를 위한 Sonata>도 될 수 있으며 <Ballade>, 혹은 <詩曲 (Poem)>도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나는 이따금 기적 같은 꿈을 꾼다. 꿈인지, 생시인지 자면서 새로운 음악의 악보가 선명하게 보일 때, 혹은 화성의 색깔이 자고 있는 귀에 선명하게 들릴 때, 놀라 깨어나서 Piano 앞에 앉아 꿈속의 그 소리를 찾는다. 실로 믿기지 않는 축복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 예로 2004년 초, 김남조 詩 『봄에게』로 詩想의 표현으로 고민할 때 그 신비스런 소리가 내게 다가온 것이다. 봄의 색깔, 봄의 흐름, 봄의 사랑의 흐름이 내게로 왔다. ”

 

나는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의 삶을 살지 않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잠 옷을 이고 잔 적이 거의 없다. 누가 선물로 잠 옷을 주면 한 쪽에 쌓아놓고 작업복을 입고 피아노를 치다가 작곡을 하다가 부엌에 가서 밥을 하다가 누웠다가 하였으므로 잠을 자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한 4시간 정도를 자는데 그 4시간간도 죽 자는 것이 아니고 2시간, 2시간 또는 1시간, 2시간 이렇게 쪼개서 4시간을 잠을 잔다.

예전에 어느 한 기자가 당신은 대사 부인인데 언제 작곡을 하냐는 질문을 하여 나는 작곡가이고 내가 어떠한 일을 하던지 내 머리 속에는 음악이 늘 왔다 갔다 하며 나는 작곡을 언제 하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그 24시간 안에는 밥 먹는 시간, 잠 자는 시간, 일 하는 시간이 다 포함되어 있어 잠깐 잠을 잘 때 피아노를 치면서 작곡을 하면서 그 악상이 머리 속에 있는데, 자는 동안에 악보가 머리 속에 쭉 벌여지는 것이, 진짜 기적이 일어난 듯 했다.

그러면 그 것을 피아노 앞에 가서 도,미,솔,도,미,솔 눌러가며 소리를 찾는다.

그것이 『봄에게』를 작곡할 때 그 소리가 내게 와서 찾게 된 것인데 그 찾은 소리를  『봄에게』의 노래에서 노래를 모조리 빼고 피아노 반주만 잘라서, 그 꿈에서 내게 온 소리를 지금 여러분에게 들려주겠다.

그리고 앞에 음악에 “나비의 연가”라는 것이 있는데 이해인 님의 시이다. 한 마리의 나비는 나이고 그 나비가 날아서 하느님께 가신 사랑, 그 제목이 좋아서 ‘나비의 연가1, 2, 3, 4’까지 썼다.

 

VI. 끝 맺는 말

   20세기의 3분지 2를 살고 21세기의 초두인 오늘에 서서 나 자신을 뒤돌아보는 것에 적지 않은 설레임과 흥분도 있다. 비록 오늘날 순수예술음악이 사양길에 들고 Fusion 음악, Cross-over 음악. 영상음악, 전기 전자 매체음악 등이 새로움을 추구하며 범람하고 있더라도 그들은 한 때의 시대적 조류에 의해 생산된 것이기에 한시적으로 쇠퇴할 것이고, 역사적으로는 경과적, 실험적 음악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면 긴 역사의 전통이 깊이 뿌리 박힌, 인간의 내면의 존엄성을 철학적, 미학적 음악으로 표현한 순수 예술음악은 시간을 초월해서 빛을 더 할 것이라 믿는다. 다만 작곡자의 심오한 사상적 작품과 고도의 기술의 연주자와 세련된 청각의 소유자인 청중들에 의한 <三位一體>가 이뤄지는 음악세계를 기대하고 싶다. 앞으로 21세기의 음악이 어디로,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20세기 음악을 역사적 論議로 결정 지을 수 없듯이 여전히 작곡가들의 음악양식의 다양성 (多樣性)으로 성장해 갈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나의 음악은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여전히 지금의 나로 음악을 만들며 청중과 함께 가기를 주저하며 앞선 자리에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