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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 리옹 출신의 오귀스뜨
Auguste와 루이 Louis
뤼미에르 Lumière
형제가 시네마토그라프
Cinématographe,
독일어로 키네마토그라프
Kinematograph (단어
의미는 영사기, 약어
Kino)를 독자적으로 발명하였다.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 Grand Café’
에서 이 형제가 최초로
스크린 투사방식의 공개
영화 시사회를 열었다.
이때 입장료는 1 Franc
이었고, 첫 상연에는
고작 35명의 관람객만이
들었다. 그러나 입 소문이
나고 그랑 카페에 수천의
관람객들이 줄을 이어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것이 영화 최초의 대중과
최초 상영의 탄생이다.
상영 프로그램은 1분
남짓의 짧은 흑백영화인「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물
뿌리는 사람」「기차
도착」이었는데, 이 중
「기차 도착」에서 기차가
역 플랫 홈에 들어오는
장면에서는 마치 기차에
부딪히는 듯한 착각이
들어 많은 관중들이 충격을
받았다. 영화학자들이
영화사에서 최초의 ‘공포영화
Horror Film’로 언급한다.
이
상연회에서 음악이 함께
했었을까? 무슨 곡이
연주 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피아니스트
한 명이 영화 상영할
때 연주했었다고 전해지는데
왜 참여하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영화학자나
음악학자들이 뤼미에르 형제가 음악반주를 삽입하게 된 연유에 대해 추론 할 뿐이다.
•
영사기 소음과 관중들의
기침,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음악이 덮을 수 있다
•
상영장의 어둠 속에서
관중이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음악이 진정제 역할을
한다.
•
영상장면에는 대사나
소음이 없어서 자막이
있었는데, 음악에 의해
대신 보충될 수 있다.
•
당시에 유흥목적으로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배경음악이 연주되었기에,
첫 영화상영에서 관중들은
당연히 음악과 함께 즐기게
되지 않았을까? |
무성영화시대
음악이 지녔던 원래 기능은
음악이 영사기 소음을
들리지 않도록 하였으며,
적절한 분위기와 리듬을
지닌 음악으로 화면 위의
사건을 강조함으로써
관객의 반응을 유도해
나갔다는 것이다.
음악의
기능은 영화적 환상을
만들어 내는 도구들을
숨기면서, 관객반응을
이끌어 나가는 것, 내러티브
상의 매끄럽지 않은 부분을
잘 무마시키는 역할을
한다. 위에서 보듯이
영화는 20세기 즈음에
생겨난 새로운 분야였고
음악은 인간역사와 함께
해 온 오래된 예술분야이다.
영화와 음악의 최초의
결합은 실용적인 수단으로서
이루어졌고, 무성영화에서
음악은 항시 같이 존재하게
된다.
영화가
극장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작곡가들이 영화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908년 예술영화사(Le
Film d'Art)가 파리에
설립되어 희곡을 대본으로
한 영화에 유명한 배우들을
출연시켰다. 이 영화사가
제작한 첫 작품은 앙리
라브당 Henri Lavedan
의 대본을 바탕으로 제작된
르 바르지 깔메 감독의「귀즈
공작의 암살 L'Assassinat
du Duc de Guise」이었다.
카미유 생상 Camille
Saint- Saëns (1835-1921)은
1911년 「귀즈 공작의
암살」을 위해 서곡과
5개의 극적인 부분으로
구성된 ‘현과 피아노,
오르간을 위한 작품 op.
128’ 을 영화에 최초로
붙였다.
1910년대
말 미국의 할리우드는
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의
영화 약세를 틈타 굳건한
발판을 세워 유럽시장들을
공략한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 영화계는 양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순수한 상업적 작품에서
아방가르드적인 실험까지
이루어졌다. 작곡가 자끄
이베르 Jacques Ibert
(1890-1962), 다리우스
미요 Darius Milhaud
(1898-1962), 조르제
오릭 Georges Auric (1899-1983)
등이 생상 뒤를 따랐다.
이들의 영화음악은 후에
언급하기로 한다.
1920년경부터
무성영화음악은 예술의
한 형태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유명한
순수음악작곡가들이 새로운
매체인 영화의 음악을
담당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1920년대
초반은 실험적 경향이
매우 강했던 시기였다.
그때까지 영화는 실험되지
않은 매체였다. 당시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적 사회적
와해, 음악회와 무대를
위한 소규모단체에 가해진
재정적 압박, 유럽음악계에
재즈의 갑작스런 출현,
음악극「기관사 홉킨스」
「죠니가 연주하다」
「서푼짜리 오페라」에
담긴 사회비판적인 이해,
후기낭만주의적인 음악미학의
붕괴, 다양한 출구를
명시하고 있는 예술미학의
방향성 상실 등이 원인이었다.
한편에선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와 같이 프로그램이
없는 것을 프로그램으로
삼고 있었고, 또 다른
한편에선 바우하우스건축처럼
새롭고 구성적인 실용미학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회적
빈곤으로 인한 사회적
불확실성, 정신적 손상에
따른 도덕적인 방황과
혼란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순수음악작곡가들이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이었고, 음악과
영화의 새로운 결합을
실험해 보고 싶어했을
것이다.
독일에서
우선적으로 호명되는
작곡가는 파울 데사우
Paul Dessau (1894-1979),
한스 아이슬러 Hanns
Eisler (1898-1962),
파울 힌데미트 Paul Hindemith
(1895-1963) 이다.
힌데미트는1921년
아놀드 프랑크 Arnold
Frank (독일영화사에서
기록영화감독으로 간주)의
영화 「산을 오르는 투쟁
속에서 Im Kampf mit
dem Berg」에 대한 총보
완성, 6막으로 구성된
이 음악의 총보는 살롱오케스트라의
형태로 편성, 연결 없이
서로 뒤섞여 진행되는
조곡이 덧붙여진 음악적
회화라 할 수 있다. 그는
당시 19세기 낭만주의적인
교향악의 온갖 종류의
음악모형을 편곡하여,
그것들을 녹음해서 기록영화의
드라마적 성향을 본보기로
일치시킨 일종의 '연관성을
지닌 음악'을 만들었다.
몇몇
작곡가들은 진짜 영화
마니아로서 본색을 드러냈다.
예를 들면 20세기 전반에
가장 유명하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아놀드
쉔베르크 Arnold Schönberg는
1929/30년에 「영화장면에
붙인 배경음악 Begleitmusik
zu einer Lichtspiel-scene
op.34」을 썼다. 그는
‘위급 - 불안 - 대참사
Drohende Gefahr - Angst
– Katastrophe’ 란 세
부분의 표제를 붙였다.
영화가 촬영되지도 않았고,
엄격한 12음음계에 따른
오케스트라 작곡구성이
조금은 파격적임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실험영화의
실제가 잘 연결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때때로 12음음계의
엄격한 구성이 감정의
상영순서와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한스
C. 슈미트는 이 곡에서
무언가 충격을 주는 불협화음의
해방은 그렇게 설득적이지는
못하다고 간주하였다.
아이슬러는
1932년 베르트 브레히트
Bert Brecht, 에른스트
오트발트 Ernst Ottwald
대본, 슬라탄 두도브
Slatan Th. Dudow 감독의
「쿨레 밤페 Kuhle Wampe」에서
음악을 담당했다. 그는
평소 브레히트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서사극이론
Dramentheorie’ 에 영향을
받았는데, 관중들이 무대에
빠져 들지 않고 항상
이성적인 관찰자로서
거리를 두고 지켜보도록
하는 ‘낯설게 하기 효과
Verfremdungseffekt’
같은 기법이다. 음악의
대위법적 사용은 그러한
시도의 한 예로써 영화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우울한
장면에 매우 경쾌한 빠른
음악을 대비시켜 실습하였다.
1943년
프리츠 랑 Fritz Lang
감독, 브레히트 Bert
Brecht와 존 웩슬리 John
Wexley 대본「형리도
죽는다Hangmen Also Die」의
오프닝 크레딧 opening
credit 음악 마지막 즈음에
히틀러 초상화가 나올
때 넓은 음역에 펼쳐진
클러스터 Cluster 같은
효과의 10성부화음으로
끝냈다. 그 화음은 전통적인
화성은 아니고 들리기에도
전위적인 울림의 인상을
남겼다. 그 전위화음으로
영화에서 비춰질 나치의
모습을 상징했다고 보여진다.

사진1-1
「형리도
죽는다Hangmen Also Die」 사진1-2
1941년
요리스 이벤스 Joris
Ivens 감독이 암스텔담
Amsterdam에서 다양하게
비의 효과를 다룬 도큐멘트
무성영화「비Regen」를
위해 아이슬러는 14분
가량의「비에 관한 14가지
묘사Die vierzehn Arten
den Regen zu beschreiben
Op.70」를 새로 작곡했다.
쉔베르크가 「Pierrot
Lunaire」에서 사용했던
12음음계 작곡기법과
같은 편성의 실내악 앙상블(플룻,
클라리넷, 바이올린(비올라로
대체가능), 첼로, 피아노)을
위한 작품이다. 매우
복잡한 작곡기법을 영화에
시도했다. 이 곡은 후에
3년 뒤 그의 스승이기도
했던 쉔베르크에게 70회
생일을 기념하여 헌정되었다.
1947년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와 공저한 「영화를
위한 작곡 Komposition
für den Film」이
옥스포드 대학 출판사
Oxford University Press에서
영어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아이슬러 자신의
영화음악실습을 이론적으로
확인하고 서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69년에는
독일어로 서독에서도(München
: Rogner & Bernhard)
출판되었다. 아이슬러는
청중과의 교감을 위해
쉔베르크 악파가 이루어
놓은 기법만을 고집하지
않고 전통적인 음악의
다양한 요소를 사용하였다.
당시 프롤레타리아 성향의
작곡가였던 아이슬러는
1947년 미국 망명 중에
소련첩자로 쫓기고 있었고,
후에 동독으로 귀국한다.
그는 동독의 동 베를린
국립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했는데, 이때 같은
대학에 교수로 있었던
데사우 Paul Dessau는
1920년대 말 월트 디즈니
Walt Disney의 여러편의「앨리스
Alice」 영화에 음악작업을
하였다. 당시 데사우의
음악은 신고전주의적이고
민요적인 요소들이 담긴
곡이었다. 그리고 1936년
프랑스의 수도에서 라이보비츠
René Leibowitz
를 알게 되어 쉔베르크의
12음음계를 접하게 되었고
그 이후의 작업에서는
그 기법이 묻어 나오게
되었지만, 1942년부터
브레히트와 공동작업을
통해 연극음악과 가곡들을
남긴 작품에서는 청중과의
교감을 중시하는 브레히트의
요구로 전통적인 음악이나
당시의 대중음악 요소까지도
포함되었다.
다시
프랑스 작곡가들로 돌아와
생상의 후배들을 살펴보면,
자끄 이베르Jacques Ibert
(1890-1962) 는 파리태생으로
파리 콘서바토리에서
포레 G. Fauré를
사사하였다. 무성영화
반주자로 생활비를 벌었고,
그의 후기작품은 이 경험을
살려 영화음악을 남겼다.
1932년 이미 영화작업에
참여하기도 했고, 1938년
영국의 「비행기 위에서의
사랑 Love on the wing」
이라 불리는 선전용 영화였는데
이베르의 ‘디베르티멘트
Divertiment’ 에 설정되어
있다. 스코틀랜드의 영화제작자
노어만 맥라렌 Norman
McLaren은 음악 속에
손으로 그린 추상적인
유형을 작동시키는 시도를
했다. 1948년부터 본격적인
영화음악 작업으로 오손
웰즈 Orson Welles 감독의
「맥베드 Macbeth」에
음악을 붙였다. 그는
파리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
1920년경
그룹 ‘레시스 Les Six’
의 활약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시인 장 꼭또
Jean Cocteau의 영향으로
에릭 사티Eric Satie
(1866-1925)의 주도아래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 (1898-1962),
아르뚜르 오네거Arthur
Honegger (1892-1955),
조르제 오릭Georges Auric
(1899-1983), 프랑시
플랑 Francis Poulenc
(1899-1963), 제르마이네
타유페르Germaine Tailleferre
(1892-1983), 루이 듀레이
Louis Durey (1888-1979)
6명의 작곡가들이 모여
그룹 ‘레시스 Les Six’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주로
후기낭만주의적인 미학에
반하여 작업하였고, 이들
대부분은 영화음악 작업에
참여했다.
리더
격인 에릭 사티는1924년
르네 끌레 René
Clair 감독의「막간Entr'acte」에
참여했는데, 발레리나가
유리판 위에서 춤을 출
때 아래쪽에서 직접 촬영한
장면이 인상적인 영화로
사실적인 묘사를 한 다다의
기록물, 즉 카메라 언어,
카메라 이동, 다양한
시각, 다양한 회전속도
및 더한 절단기법, 각
개별 장면들의 조립 등의
즐거움에 대한 기록물이라
할 수 있다. 음악은 시간의
관습에 맞서기 때문에
삽화적이거나 서술적이지
않다. 4박자, 8박자 혹은
12박자의 길이로 연결,
발전이 없는 상태로 진행된다.
아주 작은 모티브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구성했다. 사티
음악의 기본원칙은 고의적인
공전상태, 짧은 기계적인
리듬 모티브를 계속 반복하여
권태로움과 단조로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
음악은 무수히 빠르게
교체되는 다채로운 장면들을
거역하게 되고, 영화줄거리와
음악은 평행구조로 나란히
전개되어 서로 받쳐주지
않게 된다. 사티의 음악은
후기낭만주의적인 선율의
모습을 과감히 제거하였으며,
그 대신 오점투성이로
나타나는 모티브를 형성했다.
중립적인 반주음악의
텅 빈 공전 상태, 완전히
의도적으로 연상적인
암시로부터 벗어 났으며,
단지 시간의 현상을 구체화했다.
당시로서 너무나 혁신적이고
미래비전을 제시하는
그의 음악세계는 현대음악의
전위적인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미요
Mihauld는 1923년 마르셀
레르비에 Marcel L'Herbier
감독의「인정 없는 사람
L'Inhumaine」을 비롯해
20편의 영화음악을 작업하였다.
오네거
Honneger는 30편이 넘는
영화음악을 남겼는데,
아벨 강스 Abel Gance감독의「수레바퀴
La Roue, 1922」, 「나폴레옹
Napoleon, 1927」, 최초의
진정한 실험적 영화음악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만화영화 베르톨드
바토쉬 Berthold Bartosch감독의
1934년작인 「아이디어
L'idée」에 붙여진
것이다. 30분짜리 이
영화는 프랑 마세리 Frans
Masereel 의 목판화 책을
기초하고 있다. ‘옹드
마르뜨노 Ondes Martenot’
라는 전자악기(1928년에
첫 선을 보인 훌륭한
응용성을 가진 전자악기로
오네거는 그의 콘서트
음악에서 사용하였다)가
동원된다. 1949년 프랑스
장 미트뤼 감독의 영화「태평양
231 Pacific 231」에서
기차음악에 관한 오네거의
연구는 필름으로 볼 수
있도록 독창적으로 쓰여졌지만
계획은 실패했으며 미트뤼가
그것을 재생하기까지는
20년이 흘러야 했다.
음악을 위한 영상의 편집은
밀접하며, 정확하며,
곡조에 완전히 들어 맞는다.

사진2-1
「시인의
혈통 The Blood of a
Poet」 사진2-2
오릭
Georges Auric은 1931년
장 꼭또 Jean Cocteau가
감독한 전위영화「시인의
혈통 The Blood of a
Poet」에서부터 여러
편의 공동작업을 하였다.
장 꼭또는 할리우드 식의
미키마우싱 Mickeymousing
(음악을 동작에 일치시키는
것)을 부정하여 음악과
영상의 단순한 일치 대신에
영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유롭게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로서 「미녀와 야수
la Belle et la Bête,
1946」「오르페 Orphée,
1950」에서는 꼭또의
의도에 따라 오릭은 영상과
정반대되는 분위기의
음악을 작곡하는 실험을
시도하였다. 때로는 꼭또가
오릭이 작곡해 놓은 곡을
임의대로 편집해서 사용하기도
하는 등 영상과 음악부분
모두에서 전위적인 시도를
하여 유럽 영화음악전통에
한 획을 그었다. 그러한
전통을 이어 받은 감독의
한 예로 꼽는다면 장
뤽 고다르 Jean-Luc Godard를
들 수 있는데 영화음악은
이미지와 어긋나려고
노력하며, 단일 반응을
거부한다. 음악의 정서적
색채는 이미지나 대사의
정서적 색채와 충돌을
일으킨다. 고다르는 회화에서
피카소, 음악에서 쉔베르크가
이룩한 것과 같은 결정적인
돌파구를 영화에서 실현하였다.
환영주의적 재현을 공격하였던
고다르는 시각적 깊이감과
내러티브의 일정한 규칙들을
파괴하였다.
특별히
왕성한 활동으로 돋보이는
경우는 소련의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Sergej Prokofjew (1891-1953)와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
Dimitri Shostakowitsch
(1906-1975)로, 수많은
영화에 음악을 출연했다.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
Sergei Eisenstein감독의
1925년「전함 포템킨
Battlership Potemkin」의
음악은 원래 독일 작곡가
에드문트 마이젤 Edmund
Meisel이 맡았으나 현재는
악보가 소실되어 요즘
그 영화를 DVD로 볼 때
동반되는 음악은 쇼스타코비치가
붙인 것이다. 무성영화음악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마이젤의
음악을 다시 접할 수
없다는 것은 영화사에
있어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에이젠쉬타인의
영화가 상연되었을 때
직접 그의 음악을 들었던
사람들은 그 놀라운 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1939년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 Sergei
M. Eisenstein감독의
첫번째 유성영화「알렉산더
네브스키 Alexander Nevsky」에서
프로코피에프와 함께
음악과 영상의 완벽한
일치를 시도하는 병행원칙
Zuordnungsprinzip을
발전시켰다. 감독은 ‘수직몽타주’로
불렀다. 프로코피에프
는 심리적인 상태를 고려해서
표현하고, 악기로 극
중 대상의 성격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퇴플리츠에
의하면 트럼펫과 호른은
독일 정복자, 피리는
러시아군대를 상징 한다고
보았다. 그 영화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빙판
위에서의 전투 장면과
음악인데, 시각적인 특이한
구도와 불협화적이면서
러시아 민속적인 독특한
음색으로 인상적이다.
에이젠쉬타인 감독이
애초 3부작으로 기획한
영화「이반 대제 Iwan
der Schreckliche」는
1부는 1942년에, 2부는
1945년에 완성하였으나,
3부는 국가검열에 걸려
완성되지 못했다. 여기서도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으로
오페라와 같은 특성을
살리고 있다. 1934년부터
모스코바 콘서바토리에서
작곡과 수업을 맡고 있었던
프로코피에프는 위에서와
같이 에이젠쉬타인 감독과
두 작품의 공동작업으로
기념비적인 영화음악을
남기게 되었다. 그 당시
소련은 스탈린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현대적인 음악어법을
자양하고 19세기의 음악전통으로
재정비되어 1936년「피터와
늑대」라는 교향악동화를
작곡하기도 했다.

사진
3-1
「알렉산더 네브스키
Alexander Nevsky」 사진3-2
쇼스타코비치
Dimitri Shostakowitsch
(1906-1975)는 1928년
그리고리 코신즈프 Grigori
Kozintzev 와 레오니드
트라우베르 Leonid Trauberg
의 혁명영화인 「신 바빌론
The New Babylon」에서
영화음악가로 데뷔했다.
그러나 첫 상영이 있은
후 며칠 뒤 그의 음악은
제거 되었다. 관중들이
익숙하지 않은 음악에
항의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러한 스타일은
1931년 말에 “작곡가
의무 선언문”에서 비판되었다.
사회주의혁명의 이상에
맞는 오락음악으로는
단선율 양식이 후원을
받았다. 그의 음악에서
익숙하지 않고 복잡한
형식과 화음은 ‘양식화된’
혹은 ‘서구식으로 퇴폐적’이라며
반대를 받았다. 15곡의
교향곡으로 이름을 날린
그였지만 국가권력과
여러 면에서 갈등을 빚었다.
순수음악은
고급예술로 간주할 때,
영화음악은 음악적으로
가장 낮은 수준에 있다는
편견이 있다.
지금까지
여러 20세기순수음악작곡가들의
영화음악 작업들을 살펴
보았다. 여기 언급된
작곡가 말고도 아론 코플랜드
Aaron Copland (1900-1990),
벤자민 브리튼 Benjamin
Britten (1913-1976)
등이 있고, 20세기 후반의
상황은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 이렇듯 영화음악이
‘저급한 예술 neglected
art’ 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저급한 예술로 취급된
이유는 애초 영화가 시작될
때, 일반 대중들의 오락거리였으며
그들 취향의 음악으로
영상에 방해되지 않는
범위에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근 한 세기가 지났고
수많은 영화음악의 오리지널
작곡으로서의 충분한
실험이 토대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순수음악분야에
비해 영화음악은 이론적
연구가 많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그것은 음악학자들이
영화를 모른 체 음악
한 분야만 적용시킬 수
없고, 또 영화학자들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얻어지는 음악분야에
대한 지식 없이 영화음악을
논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어서였다. 그나마 지금까지
나온 영화음악에 관한
문헌들은 양쪽 분야에
대한 학습이 된 학자들의
출현 덕분이다. 요즘
한국의 영화는 그 위상이
높아졌고, 그에 따른
영화음악도 많은 발전이
있어 왔다. 그러나 좀
더 세분화된 다양성이
우리 영화계의 과제라고
많은 영화계 사람들이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영화음악분야에서의
순수음악작곡가들의 활동은
미미했다. 앞으로 우리도
영화음악분야 전문가들이
많이 생겨나고 이론적인
체계가 뒷받침 되면,
좋은 영화음악의 선별
조건들이 갖춰지고 능력
있는 작곡가들이 영화예술분야에
참여하여 문화적으로
다양한 콘텐트를 이루는
것이 새로운 과제라 할
수 있다. 영화매체에
대한 연구 없이 영화음악을
한다면, 영화분야와 동등한
입장을 취할 수 없고
감독의 취향에 맞추는
수동적인 관계가 형성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어떤 예술이든 간에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려면 그 특성에
대한 숙고한 연구와 끊임없는
새로운 실험적 시도들이
따라야 한다. 앞서 소개했던
한스 아이슬러는 “만약
영화음악 작곡가가 의미
있게 영화음악을 쓰고
싶다면, 악상의 착상이
아닌 영화음악 형식과
영화와 음악의 형식적인
관계를 발명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영화음악을
할 때는 기존의 작곡방식이
아닌 영화매체와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을 실험적으로
도전해야 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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