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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눈길’을
연주했거나 녹음한 피아니스트들은
결코 그 작품을 연주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다. 70년대에
이 작품을 취입했던 피터
제르킨은 “ ‘아기예수..’를
연주하고 난 후의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다.
피아노라는 악기는 이제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다. 새로운
지평, 놀라운 세계가
내 앞에 열렸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연주자들에게
일종의 ‘지각변동’이나
패러다임의 총체적 전환으로
다가오는 이 작품의 녹음은
그러나 예상외로 활발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이 곡을
감당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라기보다는
정신적, 문화적 혹은
순전히 기질이나 취향
면에서 이 곡을 소화해
내는 일이 어떤 연주자들에게는
쉽지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수많은 빼어난 피아니스트들
중 이 곡을 접해보았거나
음반작업을 한 이들은
아직까지 극소수라할
수 있다. 주로 유럽 구체적으로는
프랑스 쪽의 풍토와 취향에
친숙한 연주가들이 이
곡을 애호하고 있음도
흥미롭다.
메시앙과
그의 부인인 피아니스트
Yvonne Loriod 의
모습
Messiaen이
이 작품을 헌정했던 그의
부인이며 음악적 동반자인
Yvonne Loriod가 ‘아기예수...’를
초연했다. 이후 그녀의
문하생 또는 ‘Messiaen
콩쿨’ 입상자들을 중심으로
이 곡의 녹음은 이루어진다.
그런데 ‘초연’이
항상 최선의 해석이나
최고의 연주는 아니더라는
통설이 이 경우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그녀의 연주에
대한 이견(異見)들이
만만치 않았다. 아무튼
1970, 80년대를 비교적
조용히 보낸 이 곡은
90년대에 들어 비로소
활발히 연주되고 녹음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
화제를 모았던 백건우의
명동성당 연주도 1997년
들어 서서의 일이다.
한 창작품이 세상에 선보인
이후 작곡자의 진정한
의도에 상승효과을 더한
최선의 연주가 나오려면
어쩌면 일정 분량의 시간이
흘러야 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Loriod의
1973년 음반이후
‘아기예수..’의 연주
스타일은 일정한 계보를
형성하는 듯 보인다.
로리오의 직계라
할 수 있는 Michel Beroff와 Pierre-Laurent Aimard의
연주는 근래에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선입관일
수 있다는 우려가 없지
않으나 로리오, 베로프.
에이마르의 연주에는
공통점이 있다. Loriod
계열의 연주는 일단 전체
곡을 끌고 가는 페이스가
상당히 빠른 쪽이다.
번쩍이는 광채와 날렵함은
당연히 뛰어나다. 특히
복잡 다단한 리듬을 감당하는
그들의 능력은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에이마르의
연주는 몹시 가뿐하고도
청랑한 느낌이다. 그가
빚어내는 온갖 불협화음들도
상쾌하게만 들린다. 피아니스트들에게는
-필자를 포함한- ‘지옥’처럼
다가오는 No.8 '기쁨의
성령의 시선‘ 같은 곡도
그의 손에 들어가니 천국의
춤처럼 들린다. 왠만한
연주자들에게 난공불락의
거대한 성채로 다가오는
이 스무 개의 장애물이
에이마르에게는 가뿐한
놀이 같다니.... 그가
지니고 있는 에너지와
박력 그리고 무소불위의
기교적 자신감이 연주에서
곧이 곧대로 묻어난다.
단 연주의 흡인력을 위한
좀 더 묵직한 중력이나
소리의 무한히 세심한
분류에는 아쉬움의 여지가
있다. 물론 모든
연주, 모든 해석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여기에서 불레즈, 슈톡하우젠을
비롯한 현대음악의 거장들을
키워낸 메시앙의
자유분방한 제자와 작품에
관한 철학이 떠오른다.
일단 그의 품을 떠난
존재들은 스스로의 창의성만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에이마르에
앞서서 메시앙 콩쿠르에
우승한 미셸 베로프의
연주는 보다 날카롭고
지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물론 그의 전체적인 템포감각은
로리오의 직계답다. 그에게는
그러나 불꽃튀기는 혹은
투명하기까지 한 에스프리가
두드러진다. 그의
테크닉은 단단하기가
마치 수정과도 같고 날렵한
기동력은 그 누구보다도
앞선다. 특히 빠른 템포의
번호들에서 모든 감상자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을 수 있는 프랑스
피아노 음악의 이 세련된
메신저는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스타일리스트(stylist)‘라는
단어에 더욱 가깝다.
보다
내면을 향한 연주를 꼽으라면
북쪽 유럽의 사려 깊은
연주자 Hakon Austbo다.
아시아 지역에 알려진
바 없어 친숙하지 않은
이름이고 탑 레이블이랄
수 없는 낙소스에서 음반을
낸 그 인지라 어떨까
망설인다면 그런 우려는
거두는 것이 좋다. 만일
대부분의 음악 애호가들이
에이마르나 베로프를
선호한다면 연주하는
입장의 피아니스트들은
단연 오스트보를 택할
것 같다. 그의 음폭은
훨씬 넓고도 유장하다.
소리의 팔레트에도 남
못지 않을 만큼의 다양한
빛깔들이 구비되어 있다.
음색에 대한 태도도 훨씬
단호하고 정돈되어 있다.
다만 더 오래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휘황한
광채가 다소 부드럽게
순화되어 있을 뿐. 그의
템포감각은 작곡자에게
누가 되지 않을 만큼
여유롭다. 그래서 때로
‘미친 듯이’ 두드려야
하는 빠른 번호들에서의
박진감은 덜하다. 그러나
결국 음악이란 어떤 메시지의
전달이라고 이해할 때
오스트보의 어조가 한결
설득력 있다.
그
밖에 Joanna MacGregor,
Peter Hill 그리고
거슬러 오르면 Ruth Laredo,
Peter Serkin을 비롯하여
John Ogdon 또 Hamelin의
음반에까지 디스코그라피는
확대되지만 아직도 ‘아기예수...’는
탐사를 기다리는 미지의
대륙이라 보는 쪽이 옳다.
이
작품이 지닌 초시간적인
가치를 감지하는 현명한
피아니스트들은 자기
자신과 음악의 새로운
지평확대를 위해 앞으로도
끊임없는 ‘시선 탐구’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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