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세 이

 

                                                                                                                     이 병 무
 

 

  글은 현악 잡지 String & bow 10월호에 실렸던 글로서, 원칙적으로 작곡가가 아닌 현대음악을 처음 접하는 연주자를 위한 글임을 밝힙니다.

 

 

 

현대음악 연주의 당위성

 

 현대음악이라는 음악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로 연주자들 뿐 아니라 작곡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그 가치관의 혼란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그 혼란은 현대음악에 대한 몇 가지의 오해와 몰이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즉, 현대음악은 인간의 자연적인 미적 감각에 반한다는 것, 연주가 불가능한 곡이 많고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것, 서양의 발전사관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의 전통과 어긋나는 점이 많다는 것, 현대음악이라는 단어의 모호함이 가져다 주는 과거와의 단절감,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일종의 공포심, 살아 있는 작곡가에 대한 불신감, 무감동 등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오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바탕이 과거 18, 19세기의 미학적 관점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유럽에서 수백년 동안 발생했던 여러 사조의 음악이 단 몇십년 동안에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유럽에서 긴 시간에 걸쳐 차례로 진행되었던 음악적 가치관이 우리에게는 병렬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수요가 가장 많은 고전, 낭만 시대의 미학적 가치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나, 17세기 유럽의 기능적 가치관, 그리고 현대의 아방가르드적인 사고도 동시에 청중과 연주자,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음악 내부의 문제만은 아니며,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 걸친 가치관의 혼란과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 이야기하듯이 짧은 시간 동안의 고도 성장이 정신적인 것의 발달을 동반하지 못함으로 해서 많은 부조리들을 양산해 내었다. 지금도 연일 터져나오는 정치, 경제권의 비도덕적인 행태와 그 비호 세력들을 보면 마치 19세기의 왕정국가에 사는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이다. 제국주의적 가치관에선 그러한 행위가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으나, 21세기를 사는 현재 우리의 가치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술이 시대의 거울이자 치료제라는 의견에 일단 동조하고 본다면, 과거의 음악적 가치관으로는 현재의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비도덕성을 담아낼 수도, 치유할 수도 없다. 비록 베토벤이 음악에 인류애와 이상향을 담아냈다고는 하지만,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의 표현을 빌자면, “베토벤의 음악을 포함한 옛 음악이 전반적으로 지배계급의 고용상태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현실을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지배계급이라함은 자본을 의미하고, 고용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은 상업화를 의미한다. 베토벤의 음악이 살롱음악화 되어가고, 슈베르트의 음악이 단순한 내부의 침잠으로 치부되는 것을 보면, 슬프게도 그들 음악의 사회적 기능이 소진했음을 발견한다. 현재 우리 사회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추악한 사건들의 주범인 자본은 과거 왕정체제의 횡포를 능가하는 가운데, 옛날 그 찬란하고 서릿발 같았을 음악들이 우리의 복부를 부풀리는 비계 덩어리로 전락하는 광경을 너무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예술이 시대의 거울이자 치료제라는 의견에 동조할 수 없더라도, 예술이 최소한 사회를 미메시스(Mimesis, 흉내내기, 동화되기 등으로 번역되나, 정확한 의미는 인사이드뮤직 I의 김진영, “사이렌 미메시스 유토피아”, p. 80-86과 홍정수, 오희숙, “아도르노 • 달하우스 • 크나이프 • 다누저”, p. 71-78 참조)한다는 점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참여적인 성격을 띠도록 만들어진 음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작곡되고 연주되는 모든 음악들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러한 미메시스는 어떠한 제약으로부터도 자유로울 때 극대화된다. 자본에서부터 멀수록 고통의 해소는 더 많이 반영될 수 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그러한 기능을 미약하게나마 발휘하고 있는 음악은 현대음악이라는 말로 불리우는 비상업적 예술음악 뿐이다. 그 음악은 바로 이 시간에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것은 작지만 반드시 지키고 가꾸어 나가야하는 우리들의 또다른 정신적 자산이다. 우리가 현재 아무리 멘델스존 음악을 열심히 연주한다고 한들 100년 후에 멘델스존의 음악을 들으면서 21세기 초의 한국을 또는 세계를 떠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멘델스존의 음악이 우리의 시대에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진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음악이 좀 더 진솔하고, 풍성하고, 다양하고, 자유롭게 창작될 수 있도록 일차적인 의무를 지닌 사람들은 작곡가들이지만, 그것을 직접 표면화, 사회화 시키는 일선에 서 있는 사람들은 연주자들이다. 그러므로 두 창작 영역의 긴밀한 협력 없이는 청중의 공감 또한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현대음악이 많이 연주되고, 각광을 받을 때 비로소 사회적인 도덕성과 함께 정신문화도 회복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현대음악을 만들고 연주한다는 것은 멀지만, 가야만 하는 길이자, 우리의 현재 모습을 비추어 주기에 갈고 닦아야 하는 거울이다. 현대음악이 우리의 문화에서 자생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우리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사회 • 경제 체제와 이데올로기 또한 타문화에서 들어와 우리 문화화되어 있는 상황이므로, 얼마든지 맞물리게 하여 나름대로 정착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연주자들은 물론 과거의 음악을 연주 안 할 수 없다. 과거의 음악이 가지는 실용적이고 신속한 기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단지, 청중이나 작곡가들과는 달리 연주자들은 많은 시대적 가치관으로부터 중립적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모든 시대의 음악적 가치관에 그때그때 충실해야 한다. 작곡가들은 가치 중립적이 되면 개성을 잃게 되어 매우 위험하다. 오히려 자신의 가치관을 고집스럽게 펼수록 음악은 더 개성적이고 독특해진다. 연주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음악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통찰력이 오히려 작곡가들보다 더 요구된다. 자신이 담아내야 할 음악에 더 동화될수록 좋은 연주가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연주자로서 연주와 관련한 가치관, 즉 ‘해석’ 또한 시대를 막론하고 고집스럽게 일관될 수 있다. 그러나 한 연주자의 해석의 문제는 시대적 가치관 내부에서 활동한다. 모짜르트를 바그너처럼, 노노를 모짜르트처럼 연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서두에 언급한 현대음악에 대한 오해들에 일일이 답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말을 해도 용서가 되리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그 오해들이 시대착오적이고 비현실적인 투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연주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직접 좋은 현대음악을 연습해서 한 곡 한 곡씩 훌륭히 연주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질문들에 스스로 답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현대음악은 ......

 

 ‘현대음악은 어떻다’하는 것을 몇개의 문단으로 설명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현대음악에 대한 거의 모든 오해는 그것을 일반화시키고, 서로 다른 것들을 무리하게 같은 테두리 안으로 범주화시킴으로 해서 일어난다. 그러한 오류가 최대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현대음악을 처음 대하는 연주자들을 위해 간단한 참고가 될 수 있도록 부족하나마 지극히 일반적인 몇가지 사항을 적어보고자 한다. 연주자로서 현대음악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개별적인 곡들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곡을 하나씩 연주해 나가면서 몸소 체험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다양하다.

‘현대음악은 어떻다’하는 것을 몇개의 문단으로 설명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는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어떤 음악에서 나타나는 점이 다른 음악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일일이 다 서술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리와 음악 그리고 그 주변 전반에 걸쳐서 곡마다 특수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 즉 다양하다는 것이 오늘날 음악 전반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이것을 특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20세기 이전에는 오늘날과 같은 양상의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20세기 이전의 시대를 공통관습시대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조성을 탈피하는 과정에서 작곡가들마다 각기 다른 시도를 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해서, 2차대전의 공백기 후 주류형성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양상으로 다양성이 진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즉, 다양성이란 조성이 붕괴되면서 터져 나온 스펙트럼과 같은 것이다. 그 스펙트럼 중에 조성과 얼마나 가까운가 먼가에 따라서 흔히 말하는 음악적 보수와 진보가 결정되는데, 조성과 멀수록, 즉 진보적일수록 그 스펙트럼의 범위가 넓어져서 더욱 다양한 양상을 띠게 된다. 현대의 음악사는 소위 진보적인 작곡가들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이끌려 오게 되어 지금도 많은 작곡가들이 전방위 작곡가임을 자처하며 음악의 다양화에 일조하고 있다. 한편, 어떤 작곡가들에게는 이미 음악에 있어서 보수 • 진보의 개념이나 조성에 대한 강박관념 등이 없어 보이는데, 이 또한 자기 표현의 한 방법으로서 다양화에 일조하고 있다.   

 음재료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전통적으로 쓰여오던 악기들을 일반적인 방법이 아닌 다른 주법을 사용하여 새로운 음재료로 사용하기도 하고, 서양의 악기들을 제외한 비유럽권 악기들이 작곡가의 출신 지역에 관계없이 섞여서 쓰이고 있으며, 악기가 아닌 주변의 다른 물건들도 악기로 많이 쓰이고, 50년대 전자음악의 탄생과 더불어 오늘날에는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전자 매체들이 새로운 음재료를 제공하고 있다. 작곡방법과 관련하여서는, 비엔나 악파의 12음기법을 필두로, 메시앙의 음길이와 셈여림을 모드화한 작곡기법, 총열주의기법(Serialism), 스펙트럼음악기법, 음색작곡, 리듬작법, 우연성, 인용 • 콜라쥬기법 등의 이름이 있는 굵직한 방법들을 비롯하여 그 밑의 세부적인 방법들과 그 밖의 이름없는 수 많은 방법들이 각각의 곡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작곡가들은 다양한 지역의 철학 전통이나 음악 전통에서부터 나온 사상이나 방법들을 받아들여서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여 각자의 음악에 적용시키기도 한다. 유럽의 현대음악은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철학적 지지가 그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메시앙(Olivier Messiaen)과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은 인도의 음악과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곡을 쓰기도 했으며, 존 케이지(John Cage)는 선불교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루이지 노노(Luigi Nono)는 공산주의자로서 그의 작곡기법이나 성악곡에 쓰인 텍스트에는 그의 청치적 성향이 들어가 있으며, 윤이상은 도가와 불교사상으로부터 영감을 받았고, 클라우스 후버(Klaus Huber)는 아랍의 전통음악을 연구하여 작곡을 하기도 했으며, 리게티(György Ligeti)는 아프리카, 남미, 인도네시아 음악의 리듬과 음색을 연구하여 자신의 곡에 적용시키기도 하였다. 타문화에 대한 작곡가들의 개방적 태도는 음악의 다양화에 큰 촉매제 역할을 하였으며, 현대음악을 더욱 보편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므로 유럽의 역사속에서 탄생한 현대음악을 단순히 유럽 문화의 산물로만 보는 것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또한 현대음악이 유럽 이외의 지역, 즉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중국, 미국과 남미 지역에서 같이 발전됨으로 해서 더욱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음악적 결과와 결부된 모든 것을 다루며, 작곡 과정의 중요성이 강화된다.

현대음악 연주는 현대음악사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음악사를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음악의 세부적인 면까지도 다루게 되는데, 그것은 이전 시대와는 달리 현대음악사가 작곡 방법의 역사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조성 시대의 음악들은 작곡 과정보다도 소리로 드러나는 음악적 결과 자체가 거의 모든 판단의 중요한 단서가 되지만, 오늘날 작곡가들의 관심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음악적 결과와 결부된 모든 것’이며, 그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작곡의 과정 자체가 작곡가들의 성향을 결정하고 분류한다.

 기본적으로 소리에 영향을 주는 모든 요소들, 즉 음고, 음가, 음량은 물론이고, 음색에 영향을 주는 주법, 소리의 방향, 공간, 연주자의 몸 움직임 등이 모두 작곡의 중요한 재료들이다. 과거의 작곡가들이 기존에 존재하는 소리를 그대로 차용해서 썼던 반면, 말하자면 작곡가들이 음색과 관련하여 할 수 있었던 것은 바이올린 소리를 쓸 것이냐, 비올라 소리를 쓸 것이냐 등의 매우 큰 범위 내에서의 선택이었던 반면, 오늘날 작곡가들은 소리를 구성하고 있는 내부 요소들 면면을 제어함으로 해서 결과로서 나타나는 소리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즉, 소리를 매우 분석적으로 파악해서 기존의 방법으로는 도달할 수 없었던 소리의 미세한 변화를 곡의 중요한 착상으로 삼는다. 과거에 연주자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것들, 예를 들면 비브라토의 정도, 활의 속도, 활의 압력, 하모닉스 연주시 왼손이 현을 누르는 압력, 활이 닿는 현의 위치, 미분음 등이 작곡가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분석적 관심은 전자음악과 음향학을 비롯한 과학기술의 발달과 매우 관련이 깊다. 소리와 악기가 가지고 있는 메카니즘이 거의 다 밝혀짐으로 해서 재료의 영역이 넓어진 것이다.

 또한,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서 어떻게 배치시키느냐 하는 점도 오늘날 중요한 주제가 된다. 소리의 배치문제와 관련하여 작곡 과정의 중요성이 강화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는 무수히 많다.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12음기법, 베베른(Anton Webern)의 점묘주의, 메시앙의 음가와 강도의 모드 그리고 총열주의로 이어지는, 현대음악사의 기둥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제어요소들의 확장과 동시에 이성적이고 계획적인 작곡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견고한 유럽의 모더니즘 전통을 과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방법은 현재까지도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되어 현대음악의 중요한 기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국의 작곡가 존 케이지의 음악들은 음악사에서 50년대 당시 유럽의 다른 음악들과는 현저히 다른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이유는 작곡과정 자체가 가져다 주는 전위성 때문이다. 동전을 던져서 작곡을 한다거나 – “역의 음악(Music of changes)”, 별자리를 보고 그 위치를 음표화한다거나 – “연습곡 오스트랄(Etudes Australes)”, 체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소재로 삼는다거나 하는 우연성에 의존하는 작곡 방식은 유럽의 작곡계에 영향을 주게 된다. 우연적인 방법을 포함한 그의 음악 철학은 많은 추종자를 낳게 하였으며, 현재에도 열린 형식을 비롯한 불확정적인 작곡 방식은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 출신의 작곡가 이아니스 제나키스(Iannis Xenakis)는 수학의 확률 • 통계의 방법을 비롯해 당시에 이미 컴퓨터를 이용한 알고리듬(Algorithm)방식으로 작곡을 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컴퓨터 음악의 선구적인 방법들이다.

 이 외에도 작곡가마다 그리고 곡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한 제 각기 다른 방법의 작곡 과정의 예가 있다.

 

 이러한 현대음악의 특징으로 인해 원칙적으로 연주자에게도 자신이 연주해야할 곡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가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분석능력이 요구된다. 또한, 현대음악 연주시에는 작품에 충실한 주관적 연주보다는 악보에 충실한 객관적 연주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과거의 음악을 연주할 때에는 – 연주자에 따라서 의견이 다르겠지만, – 그 시대의 관점이 아닌 오늘날의 관점에서 음악을 해석하는 주관적 연주도 의미가 있겠으나, 동시대음악을 연주할 때에는 객관적 연주 자체가 이미 시대적 요구에 준하는 주관적 연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연주자의 고유 영역인 해석이 불가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좋은 연주자는 아무리 악보가 연주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어려운 부분들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 요구를 다 충족시키면서 자신만의 연주 개성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소리와 음악을 구성하는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요소들이 여전히 많다는 증거이고, 그러한 훌륭한 연주자들을 통해 작곡가들은 소리와 음악의 새로운 구성 요소와 제어 수단을 계속해서 밝혀내고자 한다. 그러므로 과거와 달리 연주자와 작곡가가 완전히 분업화된 오늘날, 이 둘의 협동 작업은 여러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필수적인 것이다.

 

새로움을 추구한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한 미래에 대한 낙관적 희망이 이탈리아를 필두로 하는 미래주의 운동으로 표출되고, 1차대전을 거치면서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이 나타나면서 과거에 대한 거부, 파괴, 반동 등의 다분히 과격한 예술운동이 진행되었다. – 이러한 경향은 당시 유럽, 미국은 물론 일본을 거쳐 이미 우리나라에도, 특히 문학 방면에 흘러 들어왔다. – 이러한 예술운동은 2차대전 후 없어지다시피 했지만, 전통에 반대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성격은 당시 유럽의 예술 전반의 분위기를 규정해 주었다.

 비슷한 시기에 쇤베르크를 비롯한 베베른, 베르크의 비엔나 악파는 자신들의 음악 전통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음악적 자율성을 추구하였다. 이들도 역시 전통을 비판하고 극복하려고 하였지만, 그들이 한 것은 무조건적인 거부가 아닌 이성과 계몽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전통을 위한 전통비판이었다. 즉, 그들은 엄연히 역사적 맥락 하에 있었고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을 흔히 음악에 있어서 모더니즘(Modernism)이라고 한다. 이 모더니즘은 파시즘으로 단절되었던 유럽의 음악 전통을 단번에 이어버리게 하는 추진력이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부에 계속 진행되었던 조성으로부터의 탈출을 완결짓는 성과를 얻게 되는데, 그 주축은 2차대전 후 다름슈타트에 모였던 슈톡하우젠, 불레즈, 노노 등의 젊은 작곡가들이었고, 5, 60년대에 총열주의라는 기법으로 눈부신 성과들을 쏟아낸다.

 이 모더니즘의 전통을 이어받은 젊은 작곡가들에 의해 시도된 급진적인 새로움의 추구를, 케이지의 음악들과 더불어서 ‘아방가르드(Avant-garde)’라는 범주에 집어 넣는다. – 혹자는 케이지만을 아방가르드 작곡가로 분류하고 있으나, 같은 시기의 젊은 모더니즘 작곡가들도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현대음악 근간의 매우 강력한 뿌리로서 현재까지도 많은 작곡가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많은 작곡가들은 음악사를 새로 써나간다는 의식이 강하다. 새로움의 추구는 단순히 음악사 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신기한 것을 통한 표면적인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적 감각 영역의 확장이라는 실용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아방가르드 음악들을 통해 청중들은 일반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새로운 차원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암암리에 절대가치로 여겨진 것들에 대한 의심이자 정신적인 능력의 확장이다.

 그런 절대가치에 대한 의심은 70년대를 거치면서 모더니즘 자체에 대한 의심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 물론, 모더니즘은 독일 작곡가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주류로서 계속되고 있다. – 즉, 이성적 특성을 가진 모더니즘에 싫증을 느끼고, 전통적인 감정미학이 부활되고, 아방가르드 정신이 퇴색하는 모습들이 곳곳에 발견되는데, 이를 가리켜 많은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고 부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하는가는 여전히 논쟁거리이지만, 필자에게는 포스트모더니즘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의 한 형태로 보여진다. 다누저(Hernamm Danuser)는 “전체성 또는 통일성에 대항하는 특성이 아방가르드에 속하는데, 이러한 요소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계속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반모더니즘의 기류는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작곡계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은데, 일단 주의해야 할 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보수성은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젱크스(Ch. Jencks)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을 “옛것에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이중코드(Doppelkodierung, double coding)”라고 규정한다. 즉, 그러한 이중코드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것이 없는 보수적인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연주자로서 현대음악을 바라보며 견지해야할 입장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쪽이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섣부른 반 모더니즘은 음악적인 성향을 보수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고, 그것은 바로 연주실력저하라는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하기에는 모더니즘의 전통이 너무 미약하기 때문에 근거없는 2분법에 빠질 염려도 있다. 작곡가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연주자에게 2분법적 사고는 음악적인 취향과 해석의 문제를 혼돈하게 만드는 치명타가 될 수도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

 

 

들을 수 있으면 연주할 수 있다.

 

이 말은 작곡가와 현대음악 연주자들 사이에서 연주와 관련하여 통용되는 말이다. 사실 이 말은 현대음악 연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대의 음악을 연주할 때에도 당연히 지켜야 하는 원칙이다. 그런데 현대음악 연주에서 강조되는 이유는 현대음악이 가지는 특수성으로 인해 많은 작곡가와 연주자들이 악보 자체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음악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를 망각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듣는다는 것은 흔히 하는 수동적인 청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기술적 청취, 분석적 청취 그리고 심미적 청취를 의미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연주자는 자신이 내야할 소리와 현재 내서는 안될 소리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기술적인 측면이 해결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현대음악에는 미분음이 많이 등장하는데, 악보에서 요구하는, 자신이 내야할 음높이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며, 다른 음높이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정확한 미분음은 지판 위에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귀로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자신이 현재 내고 있는 음높이를 청취를 통해 구분할 수 있어야 연주도 가능한 것이다.

 또, 리듬과 관련해서도 미세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예를 들어, 비교적 빠른 템포에서 삼연음과 사연음의 두번째 음들의 시간차를 느끼고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악기에서 그러한 미세한 시간차로 연주해야 하는 경우는 현대음악에서 너무도 많다. 여러 악기가 정확하게 동시에 연주하지 않고 미세한 시간차를 두고 나타나면 박절감이 분산되는데, 연주자는 이러한 결과를 연주와 동시에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셈여림과 관계해서도 미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사실상 셈여림이 귀로 구분하기에 가장 어려운 요소이지만, 연주시 구분하지 않을 경우 소리는 생동감을 잃게 된다. 즉, p와 mp, p와 più p 등의 섬세한 셈여림의 차이를 반드시 들려줘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 이 경우도 연주자 자신이 그 차이를 알지 못하면 연주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셈여림의 변화 만으로도 음색이 달라진다는 것도 체험해야 하고,  현대음악에서는 짧은 순간 급격한 셈여림의 변화가 자주 나오는데 그 때 단순히 셈여림의 변화만이 아닌 음색도 같이 변한다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맛을 잘 봐야 요리도 잘 하듯이, 연주 기술의 측면도 음악의 가장 근본적인 행위인 청취로 귀결된다.  

 

 둘째, 연주자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작곡가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첫번째로 이야기한 기술적인 면의 해결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대음악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연주자들은 가장 큰 고충을 첫번째 기술적인 면에서 가장 많이 느끼고, 기술적인 면에서 문제가 없는 현대음악 전문 연주자들은 가장 큰 고충을 바로 이 두번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가장 많이 느낀다. 즉, 좋은 연주자일수록 악보를 통해서 작곡가가 의도하는 바를 도저히 알 수 없을 때 가장 어려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작곡가일수록 악보에 자신이 원하는 소리 또는 연주자의 행위에 대해 상세하게 적는다. 주법에 관한 것은 물론이고 결과로 나오는 소리의 질적인 측면까지도 묘사해 놓기도 한다. 그리고 좋은 연주자일수록 작곡가에게 그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될 때까지 집요하게 질문한다. 작곡가가 없을 경우에는 악보에 나와 있는 모든 설명과 나타냄말을 토대로 그 의도를 최대한 유추해 낸다.

 개별 소리가 어떻게 들려야만 하는가하는 작곡가의 의도도 알아내야 하지만, 각 소리가 전체 곡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의미를 지녀야 하는가하는 의도도 알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사실 연주자에게도 분석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곡 전체의 형식과 구조가 명확하게 연주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나타 형식의 곡에서 제시부와 재현부는 조를 제외하고 대체적으로 같지만, 그 기능은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똑같이 연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점은 역시 귀를 통해 조절해 나가는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하여 결정된 템포나 셈여림의 차이가 제시부와 재현부의 각 기능을 배가시키게 된다. 소나타 형식과 같은 조성형식은 이미 오랜 기간 동안 관습적으로 사용된 틀이기 때문에 각 형식부분의 기능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현대음악에서는 곡마다 다 다른 형식을 사용하고 있고, 형식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잘게 부분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연주자는 작곡가와 지휘자의 도움을 받아서 각 부분 또는 각 소리들의 기능들을 작곡가의 의도대로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능에 맞는 템포, 상대적인 셈여림, 음색 등을 악보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귀로 조절해야 한다.

 

 셋째, 연주하는 곡의 실제적인 아름다움을 스스로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자신이 연주하는 곡을 좋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이 어떻게 보면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말일 수 있는데, 가장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어떤 종류의 음악이든 연주자가 그 곡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좋은 연주는 불가능하다. 음악을 통해 아름다움을 체험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음악을 듣는 첫번째 이유이다. 연주자가 먼저 그 아름다움을 체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청중에게 전달할 수는 없다.

 과거 전통적 조성음악에서의 아름다움은 쉽게 감지된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더 이상 음악적 아름다움의 실체에 해당하지 않는다. 즉, 시대성이 결여된 음악은 진실을 담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과거를 회상할 때 좋은 기억만을 떠올려서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현재 우리와 맞닿아 있는 모든 것을 직시할 때 맛볼 수 있다. 또는 미의 영역을 한껏 확장시켰을 때 그동안 간과하기 쉬웠던 다른 차원의 미적 경계가 드러나게 된다.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추한 것일 수도 있고, 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아름다움의 영역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선입관이 종종 범죄를 저지르므로 그것을 허무는 것은 도덕적이기까지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현대음악은 인간의 정신작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실용성을 갖기도 한다.

 달하우스(Carl Dahlhaus)는 음악의 가치판단을 ‘취향판단’과 ‘예술판단’으로 나눈다. 취향판단은 주관적으로 음악이 아름답다 추하다를 말하는 것이고, 예술판단은 음악의 내부적인 요소들 즉 구조, 형식, 주법 등의 분석을 통한 판단을 말한다. 작곡가와 연주자들과 같은 전문 생산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술판단을 해야하겠지만, 필자는 예술판단 자체가 취향판단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머리와 가슴은 개념상의 구분일 뿐인 것이다. 연주자로서 심미적 청취는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다. 연주자는 이 둘을 하나로 잇는 통합자의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기술적, 분석적 청취를 통한 객관화, 그리고 심미적 청취를 통한 주관화가 잘 어우러질 때 연주의 질은 놀라울 만큼 향상될 것으로 믿는다.

 

 

 

* 이 병 무_ 서울대 작곡과 졸업.

    독일 엣센 폴크방 대학 작곡과 기악/전자 음악 작곡전공 졸업.

    강석희, 니콜라우스 A. 후버, 디륵 라이트 사사. bmoo@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