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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기

 

국악은 대관절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한국인으로서 한국음악, 한국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없다면 그건 좀 의아한 일이 될 것이다. 전공이 그러하고 하는 일이 그러한 서양음악 종사자들도 최소한 모국문화에 대한 존경과 애정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다. 단지, 그 애정과 관심을 자신의 음악으로 표현하지 않을 따름이다. 음악에 대해서 굳이 국적 경계선을 그어야 하겠냐는 비판도 있겠으나 음악과 문화도 21세기에는 모두가 자원이고, 산업적 경쟁의 대상이다. 최근 동아시아를 뒤흔들고 있는 한류만 봐도 그렇고, 오래 동안 포기하지 않는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메이저 영화사들의 스크린쿼터 폐지강요를 통해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한국음악(한국음악에 대한 규정은 대단히 어렵다. 이 글에서는 일단 한국전통음악을 이렇게 표현하자)에 왜 애정을 갖느냐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문화적 유전자의 근원적 공감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음악의 사회적 의무 등 실천이냐 순수냐를 따지는 글이 아니기에 정치사적 구분은 피하도록 하자) 한때 신토불이란 말이 전국에 열풍처럼 휘몰아친 적도 있었다. 그 말이 일본식 조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전국민의 호응을 얻었다.

신토불이 캠페인은 먹거리와 입성에 대한 의식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미약하긴 하지만 생활문화 전반에 걸친 소비자 의식 전환의 단초를 마련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이렇다 할 소비의 변화가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음악에 대한 부분이다. 사랑해야 한다거나 좋은 음악이라는 대답은 할 수 있지만, 자신이 막상 소비하는 음악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바로 한국음악이다. 이쯤 되면 한국음악은 박제화의 도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국악계가 따로 존재해서 전국적으로 엄청난 양의 국악 연주가 열리기는 하지만 한국음악에 대한 밝은 평가와 전망을 가질 수 없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올해 문예진흥원에서 빠져나간 단일규모 최대의 예산이 어쨌거나 '국악'자가 들어간 축제에 쏟아 부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악인이거나 아니거나 국악을 이 시대의 주요한 소비음악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또한 재미있는 현상은 사적으로 대단히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면서도 예컨데 국악축전 같은 경우에는 공격적인 비판이 제기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문화계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봐서 대단히 의외성을 보이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국악에 대해 이렇듯 무조건적인 옹호를 하게 되는 지가 궁금하다. 그것을 이렇게 제목을 만들어 본다. 국악은 대관절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러나 그것을 규명하기 전에 필요한 것이 있다. 국악은 어떻게 다른 음악과 다른가 하는 문제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악은 인간에게 어느 정도 유익하다. 반대로 모든 인간에게 유효한 음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단 음악에 국한된 현상만은 아니다. 그러나 다원화된 사회인 듯 하면서도 여전히 문화현상에 있어서 주류와 비주류 현상만은 소멸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국악은 비주류음악에 속한다. 국악, 한 나라의 음악이라는 규정에 아무 이견 없는 음악이 비주류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역사가 얼마나 문화현상들을 변화시킬는지 예상할 수는 없지만, 국악이 주류음악이 되는 것은 기대난망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악의 어떤 요소들 때문에 일반 경쟁적 시장에 두지 않고 보호하고 육성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앞서 언급한 바 문화적 유전자 때문이다.

우리민족의 감정과 정서를 지켜 나가가 위해 여전히 국악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다. 의식주 패턴이 거의 서구화가 된 듯해도 여전히 김치와 고추장, 된장이 식탁에 오르는 한 국악이 원래 가졌던 정서적 종자는 대단히 중요하다. 국악은 대관절 우리 음식이 맵고 강한 맛을 가진 것처럼 다른 음악과의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그 국악의 본질에 대해서 알아보자.

국악은 다시 궁중음악과 민간음악(민속음악이란 단어에는 다분히 무의식적 비하가 담겨져 있어 그 용어는 피하도록 하겠다)으로 나눌 수 있으나 필자가 오늘 말할 국악의 제 요소를 언급함에 있어서 궁중음악은 일단 배제토록 하겠다. 즉, 다시 말해서 국악 중 민간음악에 담긴 특성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현재 민간음악은 산조, 시나위 등의 무대 종목화 된 것과 풍물(농악), 무악(굿음악), 농요 등 현장 종목들로 나눌 수 있다. (풍물놀이에서 착안한 사물놀이가 이제 완전히 무대 종목화 되었고 그 현상은 지속될 것으로 보이나 아직은 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에 무대종목으로 규정짓지는 않았다) 이렇게 무대종목과 현장종목을 나누기는 했으나 기실 그것들은 상호 간에 밀접한 연관과 영향을 공유하던 존재들이었다. 이를테면 시나위는 굿음악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으며, 산조 역시 시나위의 영향권 내에서 만들어진 독주양식이다. 산조의 발생은 생각보다 길지 않으나 작금 산조는 가장 전통적인 음악양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은 신무용을 전통무용의 전부로 인식하는 오류에 대한 지적과 마찬가지로 산조 역시 근대음악으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전통이라고 말하는 것들의 시점이 대부분 조선시대인 것은 수정되어야 할 요소들 가지고 있다. 어쨌거나 그런 사적 분류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 음악적 양식에 담겨진 한국 정서의 원형질을 아는 것이다.

무대종목과 현장종목을 나누기는 했으나 이 모든 민간음악에는 몇 가지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 장르별 미시적 분석은 그다지 필요치 않다. 해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소들은 이들 민간음악의 일반적 특성으로 받아드려도 좋을 것이다. 우리 민간음악의 특성은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음악 행위의 집단적, 노마드적 형식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문화 생산과 소비의 구분이 명확치 않다는 점이다. 셋째는 앞선 두 가지의 특성과 어울어져 음악행위의 즉흥성과 창조성이 결정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목민적 생명력을 가진 음악

논의의 편의상 세 가지로 나누긴 했지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을 명백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먼저 각자의 특성에 대해서 상세히 알아보자. 첫번째 특성인 노마드적 양식은 달리 말하면 유목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권번 등 고정적 기예 학습기관과 기생으로 대변되는 프로 음악가를 위한 무대가 존재했지만 그것은 특수한 신분들이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는 연주자가 이곳 저곳을 떠돌면서 토호의 사랑방이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허름한 주막 평상 위에서도 연주와 감상이 이루어졌다.

 

사실 그 점은 서양문화에 있어서도 대동소이한 현상이다. 나중에 따로 얘기할 수 있겠으나 그런 동서양의 민간 노마드식 문화가 쇠락하게 된 것은 프로시니엄의 발전이고, 프로시니엄의 발달은 교회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서양의 경우 오랫동안 기독교문화와 궤를 같이 한 까닭에 그 변화의 충격이 상대적으로 적거나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기독교문화에 익숙치 않은 한국에 있어서 프로시니엄 양식의 폭력적 수용(폭력적이란 어휘사용은 우리나라 현대화 과정이 주체적이지 않은 불가피한 강요에 의한 것이기에 가능하다)은 음악 본질을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번 글에서 논외로 하겠다.

그런 유랑형식의 연주는 동서양이 마찬가지 듯이 연주를 듣고 감동이 전해지면 후한 대접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밥 한 끼 동냥도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랑음악인의 연주나 연행은 매번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연행방식을 지속한 대표적 집단으로 남사당을 들 수 있다. 남사당은 그러한 후불제 조건 때문에 연행에 필사적이었다. 또한 원한다고 무조건 연행판을 벌일 수도 없었다. 남사당의 연행 시스템은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매니지먼트가 복잡했다. 먼저 마을로 들어가서 놀아도 좋은가를 양반.지주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지주들의 입장에서는 사당패의 입성이 달갑지 않았다. 사당패가 마을에 놀음판을 벌이면 아무래도 노동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거니와 놀음에 대한 비용도 결국은 그들이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당패들은 마을과 멀찍한 곳에서 풍물을 치면서 농민들을 유혹한다. 그 맛보기 놀이가 그럴 싸 해야 비로서 마을 입성이 허락되는 것이다. 예고편부터 본편까지 무엇 하나 허술해서는 연행 수입은커녕 연행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니, 그들에게 음악(연행)은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남사당은 소위 전문음악(놀이,연행)집단이다. 그러나 진정한 민간음악의 본질은 비전문집단의 놀이 형태 속에서 찾아봐야 한다.

전문연행집단인 남사당이나 재인촌 광대들은 대부분 특별한 날에 초대되거나 방문하는 경우가 되지만, 우리 민간음악의 주된 현상인 집단성과 현장성은 일터와 놀이터가 동일했던 당시 농경사회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다. 노동의 현장이 곧바로 놀이의 현장이었고 농사일의 특성상 집단성은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지금까지 학계의 연구는 민간음악(놀이)의 집단성과 현장성은 주요하게 다뤄 왔으나 그 형태면에서의 유목적 성격은 간과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사회는 농지를 중심으로 한 정착 문화를 발달시켜 왔기 때문에 유목문화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앞서 살펴 본 남사당이나 재인촌 광대 등 전문연행집단들의 연행 행태가 유목적인 점은 그 대상인 농경사회의 자생적 놀이에도 반드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고 농민들이 전문연행집단처럼 유랑 연행을 떠난 것은 아니다. 다만, 마을 내의 놀이에 있어서도 그 형태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대단히 유동적이고 역동적이라는 점이다. (물론 추후 논의할 판소리나 산조 등의 음악강상은 그런 형태와 차이를 보이는 것 같지만 좀더 깊이 따져보면 산조나 판소리 등 독주 형태에도 그러한 특성은 발견됨을 알 수 있다.그 점은 이 글의 뒷부분에서 다시 거론하기로 하자) 우리문화의 고유한 특성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판', '마당' 등의 용어들로 표현된다. 판이 들어가는 것들을 찾아보면 우선 판굿이 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판소리가 있다. 판소리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판굿은 풍물놀이의 한 형태라는 정도만 짚고 넘어가자. 표음어인 한글이기에 동음이어가 많을 수밖에 없지만 판굿과 판소리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판'이라는 단어를 그것에 적용시키는 학자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산조나 판소리는 서구문화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한국 사회 내에서 진행되는 문화사적 이행의 단계를 보이고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즉, 집단화된 놀이에서 개인화, 엘리트화의 단계로의 이행을 뜻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집단성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이행은 분화를 뜻하는 정도에서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남사당패의 연행 중 줄타기의 경우를 보면, 줄을 타는 줄광대가 다만 줄을 타는 묘기만 보인 것이 아니다. 줄 위에서 각종 묘기를 보이는 중간에 갖가지 재담과 소리(노래)를 엮어가는 것이다. 판소리가 수많은 노래들을 그 안에 담고 있는데, 그 과정에는 유랑연행을 하던 사당패의 다양한 경험들이 사설로 채집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물론 판소리라는 양식이 확정된 이후 수많은 소리꾼들이 마찬가지로 전국을 돌면서 공연을 하는 과정에서 판소리 사설은 수많은 가감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뿌리는 역시 사당패의 연행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구비문학의 일반적 특성과 궤를 같이 한다.

다시 농민들의 마을 공동체 놀이에 있어서의 유목성을 살펴 보도록 하자. 기본적으로 농민들의 연희는 이미 언급했다시피 놀이터와 일치된 바 있는 일터 즉 논이나 밭에서부터 이루어진다. 노동 강도가 유난하다 싶을 때, 한 패는 일하고 한 패는 아예 풍물을 메고 한쪽에서 흥을 돋우는 장면은 당시로서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이런 놀이가 진행되다 보면 흔히는 일을 작파하고 전적인 놀이로 진화하는 경우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들에서 시작된 놀이가 마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마을은 때 아닌 술과 음식이 마련되고 특별한 일이 없이도 거나한 마을잔치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마을 사람 누군가의 관혼상제는 곧 마을의 대사였다. 옆집 숟가락 숫자가 뻔한 시절이었으니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마을의 놀이는 어디 한 곳에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마을의 너른 장소가 최종의 대동놀이판이 벌어지는 곳이기는 하겠지만, 그것까지 치닫기 위한 전희는 딱히 정해진 곳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민간음악은 대단히 유목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구의 경우처럼 교회 등의 고정된 공회 성격보다는 지극히 즉흥적, 자연발생적 성격을 가진다. 그 유목성의 특성, 다시 말해서 노마드의 의미는 무엇인가. 특정한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거 풍물고수들의 말에 의하면 고개 하나만 넘어가도 장구가락이 달라진다고 했다. 장구하면 우리나라 악기의 대표이다. 맞장구라는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장구는 많은 합주의 반주자 역할을 할 정도로 일반적으로 소용되는 악기이다. 풍물에 장구 말고도 쇠,징,북, 날라리 등이 사용되지만 급하면 장구 하나만으로도 모든 음악이 다 해결되기도 하는 것이 민간음악의 특징이다. 그런 장구가락이 도저히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락 변화를 가졌다는 것은 우리 민간음악의 노마드적 특성을 근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간음악은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다른 점들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름의 추구는 음악의 창조성을 견인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의 구분 없는 대동성의 음악

우리 민간음악의 두 번째 특성은 문화 생산과 소비의 구분이 명확치 않다는 점이다. 앞서 예시한 사당패의 연행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와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전문연행집단의 방문을 일년 열두 달 즐길 수 없는 실정인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극장이 있어서 구경을 가거나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오일장이나 칠일장 같은 정기적인 장이 열려 장날에는 많은 볼거리가 벌어지기는 하지만, 마을 사람 누구나 장날에 가는 것도 여의치 않은 형편이다. 전문연행집단의 예술인들을 광대라고 부른다. 광대는 당시 가장 낮은 신분으로 광대란 말을 평민에게 붙였다가는 대단히 심각한 사태를 야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민들 사이에 광대란 말을 붙여도 시비는 커녕 웃고 마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이 바로 또랑광대라는 말이다. 또랑광대란 말은 소리꾼이 소리를 못할 때 비아냥거리는 뜻이 담겨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야 비유된 용례이고 원래의 의미는 동네의 비전문적인 소리꾼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호랑이 없는 산에 여우가 왕이라고, 이름난 명기명창을 대하는 날 없을 작은 마을의 소리 재주를 가진 이는 말이 또랑광대지 천하명창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 또랑광대란 말은 다시 요즘 말로 마니아란 뜻도 내포하고 있다. 마니아란 단어는 아마추어도 아니고 프로페셔날도 아닌 모호한 상태를 뜻한다. 또랑광대 혹은 마니아를 다시 표현하자면 넌프로페셔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언제고 프로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췄지만 직업화하지 않은 사람을 필자는 넌프로페셔날이라 구분한다) 또한 또랑광대가 판소리에 국한되는 용어로 굳어지긴 했지만, 그 변천의 시원에는 분명 사당패나 재인촌 광대들의 기량에 견주는 단어로 쓰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또랑광대란 단어는 우리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또랑광대가 하나의 용어로 전해질 정도면 이 사람들이 한 두 마을에 띄엄띄엄 존재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요즘 같은 미디어가 없었던 당시로서 하나의 용어가 굳어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공통성이 확보되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과거 민간에는 또랑광대가 상당히 많았을 것이고, 어느 시점에서는 마을에서 재주 좀 있다 싶으면 그저 그렇게 불러주는 애칭이 되었을 것이다. 또 개중에는 그렇게 또랑광대로 불리다가 본격적으로 소리수업에 나선 이들도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비교적 가까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또랑광대란 말은 명창이 되지 못한 소리꾼을 지칭하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또랑광래가 우리들에게 남겨준 것은 그런 측면 밖에 없을까? 그렇다면 그 단어를 이렇게 길게 설명한 필자는 지면을 낭비한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또랑광대의 존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엘리트 예술인의 예비군 집단으로 또랑광대를 볼 수도 있을 것이나, 필자가 보는 시각에서는 다르다. 또랑광대의 존재는 우리 민간음악이 가진 또 하나의 특성인 판의 특성에서 나온 현상이라는 점이다. 이 판이란 단어는 외국어로 번역이 되질 않는다. 굳이 하자면 stage가 되겠으나, 그것은 판의 의미를 대단히 축소하거나 왜곡할 우려가 있다. 다시 말해서 판이란 두번째 우리 민간음악의 특성인 주체과 객채의 구분이 없는 특성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말이며 현상이다.

민간음악의 보고인 진도아리랑의 본향 전라남도 진도의 예를 보자. 진도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곳에는 남원에 이어 두번째 국립국악원의 분원이 2004년 개원하였다. 그뿐 아니라 씻김굿, 북춤, 들놀이, 다시래기 등 중요무형문화재가 무려 네 개가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단위 면적당으로 국내 무형문화재 최다 보유 지역이다. 옛말에 순천 가서 미모 자랑 말고 벌교 가서 돈 자랑 말라는 말도 있지만, 내놓으라는 판소리꾼들도 긴장하는 곳이 바로 진도이다. 물론 우리나라 판소리 계보가 남원, 보성,전주 등 내륙지방으로 이어져 오긴 해도 전승의 상황으로 본다면 전국 어디에도 진도만한 곳이 없다. 아니 진도는 전승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그 지역의 살아있는 문화로써 소리와 춤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아직도 초상이 나면 다시래기와 씻김굿을 볼 수 있다. 그 굿판을 기웃거리자면 대단히 흥미로운 장면을 보게 된다. 굿판의 당골(전라도 지역의 세습무당을 지칭하는 말)이나 악사보다 더욱 구성진 소리로 따라 부르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구경꾼들의 틈새에서 구성진 소리를 뽑아내는 노인은 결코 당골네도 아니고, 악사도 아니다. 그저 진도에서 오래 살다 보니 자연 익숙해진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노인이 젊었을 때는 바로 또랑광대였을 것이다. 그런 실력이 어디 씻김굿 사설에 만족했겠는가. 진도에 전승되는 민요는 진작에 섭렵하고 판소리 눈대목을 여러 대목 꿰차고 있어 마을 대소사에 청해지는 마을 소리꾼이었을 것이다. 우리 민간음악의 특성인 판은 이런 또랑광대들에 의해서 딱히 무대가 지정되지 않는 현상을 연출한다. 막상 소리꾼이라고 불려져 나온 이가 소리를 하다가도 좀 먼 곳에 앉았다 싶으면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내처 자신이 불러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판이 깨지는 것도 아니다. 구경꾼들로서는 이곳의 소리도 듣고, 저곳의 소리도 들으며 마냥 즐기면 그만이었다. 또랑광대가 있으면 아류도 존재하는 법. 어느 순간에는 아예 소리꾼의 존재는 사라지고 온 마을 사람들의 합창으로도 이어지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 흔적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전승 판소리 다섯 바탕을 살펴보면 대부분 민요의 채용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데 춘향가를 보자면 과거에 급제한 이몽룡이 어사의 직책으로 전라도 지방을 암행하게 된다. 남원에 다다른 이몽룡이 농민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무척이나 유명한 '농부가'가 나오게 된다. 농부가는 바로 노동요이자 민요이다. 이렇듯 판소리가 다양한 노래와 음악 장르를 채용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는 앞서 말한 또랑광대의 공연 개입과 그로 인한 신명의 확산 등의 경험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소리꾼 입장에서는 그럴 바에는 아예 그렇게 모두가 자연스럽게 합창할 부분을 두는 것이 유리하게 판단되었을 것이다. 우리 민간음악의 고유한 특성 중 하나인 추임새도 그런 현상의 전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정리하자면, 우리 민간음악은 음악 행위자와 향유자가 존재하기는 했으나 일단 판이 형성되면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특성을 갖는다. 구경꾼이 거나해져서 함께 따라 하거나 하다못해 말참견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 판을 쉬이 깨지기 마련이고, 그 연주자는 다시 그 마을을 찾을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 전통이 이어져서 지금도 추임새가 없는 판소리나 산조는 연주자가 연주하기 무척 힘겨워 한다. 만일 이런 현상을 서양음악에 적용하게 된다면 아마도 몰상식하다거나 심하면 음악회를 버렸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청중의 적극적이다 못해 거의 연주자와 동일하게 개입하는 음악현장을 서양음악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것이다.

 

자유분방한 즉흥성이 살아있는 음악

마지막 우리 민간음악의 세 번째 특성으로 들어가 보자. 이는 음악행위의 즉흥성과 창조성이다. 즉흥성과 창조성으로 말하자면 세계 어느 나라의 음악에도 공통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또한 모든 라이브 무대에서는 즉흥성에 의한 아우라는 청중들에게 특별한 감응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우리나라와 유사한 음악형태는 인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구전심수 방식의 음악학습방법이나 즉흥성을 중시하는 등은 매우 닮아 있다. 과연 우리 민간음악의 즉흥성과 창조성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

민간음악의 창조성을 나타내는 유명한 말이 전해진다. 산조의 명인이 제자에게 한 말인데, 연주를 나무래는 스승에게 제자가 항의를 담은 불평을 하게 된다. "어제는 선생님께서 분명 이렇게 연주하셨습니다"라고 하자 스승은 단박에 "이놈아, 그건 어제의 산조지. 오늘 산조는 또 다르다!"라고 일갈한 것이다. 산조의 명인 심상건의 일화이다. 이 짧은 문답을 이해하게 되면 한국민간음악의 주요한 정신을 이해하게 된다. 과거 산조의 명인들은 자신만의 바디를 완성하고도 그대로 연주하는 법이 없었다. 그날의 연주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화를 가져갔던 것이다. 판소리에도 그런 모습이 최근까지도 남아 있었다. 2003년 세상을 떠난 인당 박동진 명창이 그런 좋은 예인데, 박명창은 일상에서나 무대 위에서나 걸쭉하다 못해 점잖은 사람은 듣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로 욕을 잘했다.

박동진 명창의 일화는 흥미롭기도 하고 동시에 민간음악의 고유성을 잃어가는 한국음악계에 행간의 깨우침을 주기도 한다. 박명창이 국립국악원에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분명 공연은 적벽가로 준비되었고 공연장을 찾은 청중들도 적벽가를 듣기 위해 왔다. 그러나 막상 무대에 선 박명창이 청중들하거 이런저런 너스레를 나누더니 느닷없이 수궁가로 바꿔 부르는 것이 아닌가. 물론 적벽가를 몰랐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날의 청중들에게 적벽가보다는 수궁가가 더 맞다는 판단으로 그리 했다는 것이다. 박명창 아니면 누구도 실행도, 상상도 못할 일을 서슴없이 한 것이다. 그것은 박명창의 괴팍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바로 민간음악의 고유성에 의한 즉흥성의 발휘인 것이다.

악보가 없이 스승에게 한 대목 두 대목 받아서 학습하는 우리 음악의 특성상 음악은 바로 사람이었다. 그 얘긴 사람에 따라서 음악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음악이 사람의 성향을 유인하게도 되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어느 스승에게서 음악을 배운다는 것은 동시에 그 스승의 인간적 특성까지도 이어받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 혹은 동양의 다원적 미학 구조는 그조차 다시 비튼다. 그렇게 스승에게서 음악과 사람됨에 대한 지대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스승의 음악을 그대로 하게 되면 그것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음악가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 스승 스스로도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에게 자신과 다른 음악을 만들어내기를 요구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 민간음악의 전수는 구전심수(口傳心授)와 수이불수(授而不受)의 방식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풀어서 말하자면 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으며, 가르치되 그대로 배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르치고 배움에도 정형이 없고, 연주하고 듣는 것에도 그러했던 한국민간음악의 정신은 그러나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1962년 문화재관리법이 제정된 이후 음악을 비롯해서 전통문화 전반에 걸쳐서 문화재가 지정되고, 그것의 전승을 위해 이수, 전수의 시스템은 과의 전통적 정신은 망각한 채 지정된 당시의 것을 똑같이 하기를 강요하게 된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자유분방함과 즉흥성 강한 음악의 전승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케 되는 다양한 음악 유파에 대해서도 이 문화재관리법은 외면하였다. 물론, 그 문화재법의 경계 바깥에서도 민간음악가들은 굴하지 않고 음악을 이어왔지만, 제도란 관습보다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기에 지금은 무형문화재가 거의 유형화 되어 버렸다. 그래서 산조의 명인들이거나 귀명창들은 더 이상 산조는 없다는 극단적인 말도 서슴지 않는다.

판소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다. 문제는 판소리가 진정 한국인을 비롯해서 세계인류가 보존해야 할 진정한 가치는 신채효가 말한 것들 중 일부에 불과한 사설, 성음만은 아니다. 신채효가 말한 것은 네 가지이다. 인물치레도 있고 너름새도 있다. 너름새는 발림이라고도 하는데 근래의 판소리는 이 발림이 급속도로 축소되거나 패턴화하고 있으면 인물치레의 본뜻도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다. 이렇듯 개인연주영역의 판소리와 산조의 정신이 소멸되어 가는 동안 집단유형의 풍물의 대동성 역시 사라져간다. 특히 집답유형의 음악놀이는 과거의 농경사회가 붕괴한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그리고 최근 농촌문화를 말살하는데 앞장  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농촌을 위한답시고 찾아다닌 방송사의 노래자랑 프로이다. 또한 시골 구석까지도 파고든 노래방 문화이다. 티비에 노래방까지 가세한 외래문화의 입체공격에 농촌문화는 백기를 든 상태이다.

 

민간음악의 건강성 회복을 위한 운동의 필요성

21세기를 맞은 한국에 국악은 존재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민간음악은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물론, 거기에는 앞서 말한 제도와 미디어의 영향도 컸지만, 국악계 내부의 문제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오늘 필자의 언급은 국악 중 민간음악에 국한하였다. 나머지 궁중음악 혹은 정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논외로 하였다. 그 음악양식들이라고 민간음악의 특성들이 배제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에 더해져서 궁중문화의 지고한 철학적 의미들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상류계층의 음악과 민간음악이 국악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 혼재하게 되면서 야기된 현상들은 기대처럼 시너지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 문제는 현존하는 모든 국악인들을 거론해야 하기에 대단히 민감하고 조심스럽다. 또한, 필자처럼 비개비(국악인이 아닌)가 외부적 시각으로 비판하기 보다는 내부에서의 고백이 더욱 필요하다. 해서 국악계 내부의 문제는 추후로 미루기로 하겠다.

다만, 이대로 사라져 버리도록 방치하기에는 너무도 안타까운 민감음악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비단 국악인이 아니어도 앞장서 지켜내야 한다. 20세기가 문화재보호법으로 대표하는 외양의 보존시대였다면, 21세기의 숙제는 그 내용과 정신의 전승이다. 그러나 다행한 점은 그런 국악계에 건강한 운동성을 지닌 움직임이 미약하나마 몇 년 전부터 진행되고 있다. 전주산조페스티벌을 통한 산조정신에 대한 고민들, 창작판소리를 위한 또랑광대협의회, 소리여세, 바닦소리 등 소리꾼들의 창작판소리에 대한 실천적 모임 등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이들 현상을 중요한 사건들로 정리하는 이유는 그들의 중심적 역할 속에는 과거와 똑같지는 않아도 음악행위자가 아닌 사람들이 동행한다는 점이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기획자일 수도 있겠고, 프로듀서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들을 귀만 가진 또랑광대, 혹은 귀명창들로 부른다.

또한 올해 여름부터는 KBS 1FM의 국악프로 피디가 귀명창 대회라는 것을 매달 진행하고 있다. 앞서서의 사건들과는 달리 이 귀명창대회는 FM라디오를 통해 매달 전국에 송출된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은 좀 더 빠르고 클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 프로그램 피디 역시 국악인이 아니다. 이처럼 민간음악의 혁명을 위한 배경은 비국악인들의 적극적인 실천과 맛물려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혁명에는 반혁명이 존재하듯이 이들의 실천은 아직 국악계 주류의 환영을 받고 있지는 않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경계의 대상으로 여겨지거나 비하되고 있는 부분도 존재한다. 이렇듯 한국 민간음악의 쇠퇴와 재건의 명암이 공존하는 것이 21세기 현재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러는 동안 국악계에서는 창작국악이라는 것이 생겨났고, 없었던 작곡이라는 개념도 채용되었다. 심지어는 창작국악을 넘어서 퓨전국악의 시대로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 상황에서 국악은 창작국악이 오래 된 전통국악의 비중을 넘어서고 있다. 이제는 외부요인에 의한 변화보다는 국악계 내부의 동인에 의해 국악계가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만난 한 국악계 원로는 그러한 현상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토로한다. 그런 것인가? 진정 국악계의 진로는 루비콘강을 건넌 것인가는 아직 확정지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아직도 기회는 있으며, 의무 또한 있다. 그것은 국악인들의 손에 맡길 것이 아니라 국악의 정신과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운동의 형태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우리 민간음악이 가졌던 대동성과 놀이성은 농경사회가 붕괴된 이상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될 수는 없다. 그것이 엘리트 국악인들의 무대종목으로 편입된 현상은 다행인 점도 있으면서 동시에 본질훼손의 문제점은 그대로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사회로 유기적으로 계승될 수 있는 방법과 가능성을 찾아야만 한다. 국악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의 정신과 정서가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국악이 없더라도 민족정서가 면면히 이어질 수 있다면 국악을 버려도 좋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국악을 제대로 살려서 민족정서를 이어가야만 한다. 민족문화가 올바르게 선 이후에 우리는 국제사회에 대해서 세계문화 다양성을 피력할 수 있을 것이다.

 

   • 김기 _ 평론가추천 판소리완창축제 감독